티스토리 뷰

스토리 보상

: 경험치 3,540,000

: 골드 57,000


 

(신념이 무너진 자리 스토리에서 이어짐)

 

 

# 로체스트 로나운 성채

 

(타라타 왕성 알현실.)

 

이세트 : …동맹군이 죽음을 각오한 듯 밀려들고 있어.

에녹과 세자르는 전 왕국군 병력을 동원한 데다가…. 외성은 텅텅 비었고 내성 안에선 모두가 뒤엉켜 싸우고 있어….

 

밀레드 : …그래서? 우리가 전쟁 중이란 걸 이제야 깨달은 건 아닐 텐데?

 

이세트 : …네 백성이 죽어가고 있어. 밀레드. 그런데도 넌…. 괜찮은 거야?

 

밀레드 : …그들 모두가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야.

그보다 플레이어가 이곳으로 오고 있어. 지금 준비가 급한 건 그쪽이야.

…….

…윽…!

 

이세트 : 괜찮아…? 라다톤 대교에 다녀온 이후로 안색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

 

밀레드 : 손대지 마! …난 괜찮으니까.

 

(밀레드는 비틀거리며 왕좌에 간신히 앉았다. 그리고 거친 호흡을 애써 가다듬었다.)

 

밀레드 : 병사! 내가 지시한 건 처리해뒀겠지?

 

근위병 : 예, 폐하. 대성당으로 가는 길은 지상과 지하 모두 차단해두었습니다.

 

밀레드 : 그래. 이제 여기로 올 수밖에 없겠지.

…드디어 끝을 보는 거야. 마하와의 계약을…, 여기서 완수하는 거라고.

 

이세트 : …밀레드….

…….

 

…….

…….

 

(한편, 동맹군 선봉)

 

스피노스 : …왕성 내에 부패의 향이 가득하군. 대체 왜 내가 이 싸움에 나서야만 하지?

왕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폭정을 일삼고 백성들은 서로를 증오해 칼을 겨누는 나라를 위해?

 

리엘 : 어휴, 또 시작이네.

 

스피노스 : 어차피 무너질 국가는 어떤 수를 써도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있다.

일개 인간이나 가짜 영웅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단 말이다.

이런 곳에서 시간 낭비를 할 바엔 차라리 한시라도 빨리 빛의 인도자를 보필해

그가 악에 맞서 세계를 구원할 시기를 앞당기는 것이 효과적일 테다.

 

리엘 : 친구야, 너는….

 

브린 : 제가 대신 이야기하죠.

당신, 대체 뭐 하자는 겁니까. 이 난리 통에 혼자 고고한 척 궤변만 늘어놓으면 답니까?

 

스피노스 : 뭐라…!

 

브린 : …….

말리지 마십시오. 플레이어. 때가 때인데 할 말은 해야 되지 않습니까?

당신은 매번 듣고 있자니 핀잔이나 불평만 늘어놓는 거 같은데.

위대한 영웅 루 라바다와 함께 세상을 구한 신관이라는 자가 이 모양이라니…. 답답할 노릇이군요.

괜한 이야기로 사기만 떨어뜨릴 거면 저희도 아쉬울 거 없습니다. 이쯤에서 갈라서시죠.

 

리엘 : 히히, 결국 한 소리 들었네.

아 참, 참고로 난 제자 편이야. 갈라설 거면 혼자서 잘해 보라고. 히히히.

 

스피노스 : …리엘!

 

브린 : 구원 운운하기 전에 현상을 똑바로 보십시오.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다음도 없습니다.

더는 지킬 것이 남아있지 않은 세상에 구원이 찾아와봤자 뭘 구원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왕국 모두가 잘못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왕국의 그 누구도 이런 다툼을 바란 적 없습니다.

모두 마하의 암시 마법에 걸린 것뿐이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스피노스 : …….

그 말은 국왕도 암시 마법에 걸렸을 거라고 믿는 듯이 들리는군.

 

브린 :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보았던 불안정한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지금껏 몇 번이나 비슷한 사례를 목격했으니까요.

 

스피노스 : 암시 마법이라…. 그것참 편한 면피 사유 아닌가. …차라리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는지.

…….

 

브린 : 그 석연찮은 침묵은 뭡니까.

 

스피노스 : …잠시 옛 기억이 떠올랐을 뿐이다.

 

브린 : 뭐라고요?! 간만에 쓸모 있는 말을 하려나 싶었는데 태평한 소리만 늘어놓는군요.

 

리엘 : 제자야, 원래 늙은이들은 자주 과거에 잠겨.

그러니 바보 혼자 머리나 식히도록 잠시 내버려 두자. 화내지 말고, 응?

 

브린 : …예. 마음대로 하시죠.

머리를 식히고 나면 부디 마음을 고쳐먹길 바랍니다. 영웅과 뜻을 나란히 하는 신관답게 말입니다.

 

스피노스 : …….

신관…. 답게라….

 

리엘 : …….

 

…….

….

 

리엘 : 자, 머리에서 김이 펄펄 나는 제자도 보냈으니.

말해봐. 스피노스. 대체 뭔데 그래? 응?

 

스피노스 : …지금 일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얘기다.

 

리엘 : 내가 널 하루 이틀 본 줄 알아? 붕대에 칭칭 감겼는데도 네 못난 표정이 훤히 보인다고.

뭐가 걸리는지 똑바로 말해. 그래야 심술을 받아줄 수가 있다니까.

 

스피노스 : …….

 

리엘 : 어라? 입꼬리가 쬐금 올라갔네?

뭐야? 왜 웃어? 늙은이 심통을 늙은이가 받아주겠다는데 웃겨?

 

스피노스 : …….

…그 시절에도 늘 이런 식이었지. 다 늙어서도 이리 재롱을 떨고 다니나? 리엘?

 

리엘 : 흥.

 

(스피노스는 웃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낮은 소리를 냈다.)

 

스피노스 : 알았다. 여흥인 셈 치고 말해주마.

…모래가 쌓이고 쌓여 이제는 덧없어진 시절의 이야기를 말이다….

 

…….

…….

 

이세트 : …아까부터 미세하게 느껴지던 지면의 진동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게다가 알현실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숨 막히는 열기는….

…!!! 이건…!

 

(곧이어 흐르는 용암과 함께 돌기둥이 알현실 벽면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괴로운 듯 밀레드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밀레드 : …으윽….

 

이세트 : 밀레드, 지금 네 모습…. 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어….

네 몸…. 그리고 네 정신은….

 

밀레드 : …플레이어를 맞이할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야.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둬.

 

이세트 : …….

…밀레드. 들려주고픈 이야기가 있어. 지금껏 함께하면서도 제대로 들려준 적 없던 내 살아생전의 이야기.

 

밀레드 : …그동안 이야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지금이지?

 

이세트 : …….

그건….

 

(이세트는 대답 대신 가늘게 떨리는 밀레드의 손을 잡았다.)

 

이세트 : 싸움이 시작되기 전 긴장을 달랠 짧은 여흥이라 생각해 줘.

그리 길진 않을 거야. 찰나에 흘러가 버린 나의 시간만큼이나 말이야….

 

밀레드 : …….

 

…….

…….

 

스피노스 : 과거, 사막에는 커다란 왕국이 있었다.

왕국의 영토가 얼마나 큰지 왕조차도 정확히 몰랐다. 사막 전체가 왕의 땅이었다.

왕국의 이름은 모하드. 하지만 사람들은 또 다른 이름을 더 선호했다….

태양의 왕국.

그리고 나는 태양의 왕국의 대제사장이었다.

신권정치 체제하의 왕국. 모하드의 왕은 태양신의 후손이자 신의 대리인이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인 나의 역할은 태양신을 모시고 그 후손인 왕가에 봉사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 태양의 무녀를 보필하는 것이었다.

 

…….

…….

 

이세트 : …사막의 공주는 반드시 무녀로 태어난다.

나는 그 운명에 따라 태어난 태양신의 무녀였어. 태양신의 계시가 담긴 환영을 보고 이를 전파하는 게 내 역할이었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현듯 찾아오는 허락된 찰나들, 과거, 현재, 미래의 환영을….

왕의 발치에 마련된 황금 성좌에 앉아 나는 수많은 계시와 예언을 말했어.

다음 비는 언제 내릴지. 적국이 언제 어디서 기습할지. 눈앞의 신하가 불충한 마음을 품었는지 아닌지.

…그래. 사실 내가 내뱉는 말은 대부분 공허한 거짓에 불과했어.

내 능력은 진짜였지만…. 왕실의 사정과 정세, 왕의 입맛에 맞는 계시를 내야만 했거든.

왕이 곧 신의 대리인 국가에서 나 같은 존재는 체제를 강화할 더없이 좋은 도구야.

그래서 나는 태양신의 입이 아니라 왕의 입으로써 자유롭게 말할 자유를 박탈당한 채 시들어갔어.

내가 전해야 할 정당한 계시마저 삼킨 채 침묵에 순응하며 도구로서의 삶을 이어갔지.

 

어린 이세트 : …스피노스. 나는 거짓말쟁이인 거야?

대제사장 스피노스 :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공주님.

어린 이세트 : …오늘도 또 거짓말을 했잖아. 아까 끌려간 그 남자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는데….

대제사장 스피노스 : …….
…태양의 무녀 답지 못하시군요.
이 나라의 왕께선 곧 태양신의 화신. 그리고 당신은 태양신을 모시는 무녀.
태양의 무녀라면 감히 그분의 뜻에 의심을 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녀인 당신의 의무이며 대제사장인 나의 의무입니다. 아무리 슬프고 괴롭더라도 말입니다.

어린 이세트 : …의무…. 하지만….

대제사장 스피노스 : …….
태양은 모든 땅에 빛을 내리는 존재. 그런데 태양의 무녀인 당신이 이리 울상이어서야 되겠습니까?
어서 인상을 펴시지요.

어린 이세트 : …훌쩍….

대제사장 스피노스 : 크흠….
…거기, 이리 오너라. 나보다는 네가 공주님을 달래드리는 게 낫겠구나.

? : …….

대제사장 스피노스 : 공주님. 공주님께는 이미 익숙한 얼굴이겠지요.
이 자의 이름은 하반입니다. 혀가 없어 말은 못 하지만 두 귀만은 훤히 열려 있지요.
공주님이 털어놓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자에게 얼마든지 털어놓으십시오. 그는 당신을 위해 침묵을 지켜줄 겁니다.

하반 : …….

(스피노스의 말에 하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이세트 : …….
하반….

 

이세트 : 너도 잘 알다시피 그는 곧 나의 소중한 존재가 되었어.

날 도구로 이용하는 왕가의 사람들, 사사건건 엄격한 스피노스와 달리 그만은 언제나 온전한 내 편이 되어주었거든.

우린 우리만의 수신호를 만들고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은밀한 비밀은 물론 내가 보았지만 말하지 못한 계시들.

평민들의 생활이나 하반의 급여로 근근이 먹고사는 선량한 가족의 소박한 이야기까지.

 

하반 : …….

(하반은 손짓으로 무언가를 표현했다.)

어린 이세트 : 아니, 네가 나오는 계시는 본 적이 없어. 물론 내가 나오는 계시도.
계시란 건 내가 보고 싶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상을 지정해서 볼 수도 없거든.
그저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데 아버지는 나를 자꾸 거짓말쟁이로 만들려고 해.
아버지가 원하는 말을 하지 않을 거면 차라리 침묵하라고 화를 내셔. 그리고 난…, 그게 정말 싫어.

하반 : …….

어린 이세트 : 그럼 이번엔 내가 물을래.
하반, 왜 내게만 충성을 바치는 거야? 넌 아버지의 호위병이잖아.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느라 혀까지 잘려놓곤….

하반 : …….

 

이세트 : 그는 아무런 답이 없었어. 그저 묵묵히 웃을 뿐이었지. 하지만 난 그걸로 충분했어. 더는 채근하지도 않았지.

우리 사이엔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애정과 유대가 있었으니까.

하반을 통해 나는 억압으로부터 자신을 되찾고 더 넓은 세상에 대해 알아나갔어….

그와 나는 이후로도 쭉 함께였어…. 나의 충직하고 다정한 하반….

 

…….

…….

 

스피노스 : 대제사장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하며 안분지족하던 나날.

눈앞의 태평성대에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소녀였던 공주가 여인으로 거듭날 즈음 태양신의 신전에서였다.

 

모하드의 왕 : …쯧쯧쯧. 기가 차는군, 기가 차.

대제사장 스피노스 :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폐하.

모하드의 왕 : 이 신전엔 우상이 너무 많아.
이 땅에 태양은 오직 하나일진대 어찌하여 이토록 많은 우상을 섬긴단 말인가?
그래, 태양은 오직 하나뿐이다. 하나뿐이야….

대제사장 스피노스 : 폐하…?

 

스피노스 : 왕은 이미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지 않았다.

그의 언어는 바로 눈앞에 우뚝 선 거대한 태양신 상을 향해 있었지.

당시엔 태양신의 화신인 그가 태양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은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의미를 알 수 없던 흩어진 말들은 곧 현상이 되어 다가왔다….

 

모하드의 왕 : …너는 이교도로구나. 그 불손한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느니.
여봐라, 당장 이놈의 눈알을 모두 파내고 수족을 잘라버리거라.
저놈이 태양 아래서 애벌레처럼 기는 모습을 보아야겠느니라.

하반 : …!

대제사장 스피노스 : 폐하…!

무녀 이세트 : …폐하!!!

모하드의 왕 : 시끄럽다! 태양의 권능에 도전하는 이에겐 마땅히 본보기를 보여야 할 것이매.
신을 모시는 너희가 감히 나의 결정에 반기를 드는 것이냐?

무녀 이세트 : …….

대제사장 스피노스 : …아니옵니다, 폐하.

 

스피노스 : 이전엔 이세트 공주의 계시를 통해 명분이라도 가졌던 죽음들이 이제는 하루에도 몇 건씩 왕에 의해

자행되었다. 불필요하도록 잔혹한 형태로. 급작스러운 결정 아래….

상황이 그렇게 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왕에게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왕을 저지하거나 반기를 드는 대신 의무를 택했다.

젊고 혈기 넘쳤던 내겐 의무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곧 나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기에.

 

? : 저기, 미안하지만 우릴 도와줄 수 있겠어? 아무래도 내 아들이 열사병에 걸린 듯한데….
다들 엘프를 처음 봤는지 겁에 질려 하며 신전으로 가라더군.

대제사장 스피노스 : 다, 당신들은….
그 귀…, 그 날개는 대체….
…일단 엘프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먼저 그를 치유하도록 하지요.

 

스피노스 : 흰 로브 안에 날개를 감춘 어두운 피부의 신과 그의 부축을 받고 있는 태양빛 금발의 엘프.

별안간 태양의 신전에 나타난 이방인들은 전혀 닮지 않았는데도 서로를 부자지간이라 했다.

 

마나난 : 치유 솜씨가 아주 훌륭하구나.
다우나는 주로 숲에서 지냈다 보니 이런 열기에 오래 노출되는 게 힘들었던 모양이야.

대제사장 스피노스 : 사막까진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여긴 엘프의 터전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곳일 텐데요.

마나난 : …우리들은 사람을 찾고 있어.

 

스피노스 : 이교의 신은 나긋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엘프가 회복될 때까지 그들이 신전에서 머무는 걸 허락했고 일과가 끝나면 매일같이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낯선 입에서 흘러나오는 사막이 아닌 세상에 대한 이야기. 왕에 대한 반감과 대제사장의 의무 사이에서

번민하던 나에게 있어 그들과의 교류는 뙤약볕 아래 오아시스나 다름없었다.

 

마나난 : 가끔은 사막을 떠나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아, 스피노스?

대제사장 스피노스 : 평생을 모래 위에서 살아왔으며 죽을 때도 모래 위에서 죽을 운명.
그것이 이 나라 대제사장의 의무입니다. 다른 결말은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길을 잃었습니다.
나라의 신관으로서 가져선 안 될 부정한 생각에 휩싸여 신성한 의무를 의심하기 시작했지요.
더는 내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마나난 : 그렇다면 더 큰 의무에 기여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건 어때?

대제사장 스피노스 : 더 큰 의무라면…. 대체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마나난 : 이 세상을 구하는 의무.

대제사장 스피노스 : …!

마나난 : 지금 우리에겐 의무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자가 필요해.
어떠한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의무를 다할 굳건한 신관….
물론 그가 치유 솜씨가 좋은 치유사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스피노스 : 이교의 신은 돌연 상상하지 못할 제안을 해왔다. 엘프 다우나를 보필하는 신관이 되어 세상을 구하는 것.

본분을 저버리고 여행을 떠나라니 본래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이야기였다.

그러나 나는 태어나서 처음 겪는 혼란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교의 신이 내린 계시가 내겐 마치 구원의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난 때마침 나타난 이교의 신에게 자신을 의탁하기로 했다.

조국에 잠시간 작별을 고하고 나 자신과 본분에 대해 돌아볼 시간을 가지기로 한 것이다….

 

무녀 이세트 : …도망치는구나, 스피노스. 너도 연이은 폐하의 망동을 모르는 바가 아닐 텐데.
의무니 뭐니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조국과 태양신, 폐하를 저버린 채 제 살길을 찾겠다는 것이냐?
…나라의 신관 답지 못하구나.

대제사장 스피노스 : …당치도 않습니다. 공주님. 저는 그저….

무녀 이세트 : …됐어. 괜한 변명할 필요는 없다.
오늘 나는 네게 작별을 고하고 각오를 전하러 온 거니까.

대제사장 스피노스 : …각오요?

무녀 이세트 : 그래. 네가 방황하는 동안 내가 태양의 왕국을 지키겠다는 각오.
넓은 세상을 만난 네가 다시 돌아올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돌아올 고향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대제사장 스피노스 : …….

무녀 이세트 : 나는 왕국의 역사가 이대로 무너지도록 두지 않겠어. 절대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대제사장 스피노스 : …….
훌륭한 어른이 되셨군요. 공주님….

 

스피노스 : …황금 성좌나 금빛 베일이 없어도 그 순간의 그녀는 찬란히 빛났다.

그래서 더욱더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세트 공주가 있는 한 태양의 왕국은 안전할 테니까.

공주에게 감화된 나는 떠나기 전 그녀를 위해 내 마지막 의무를 다하기로 했다.

바로 믿을 수 있는 자를 찾아 대제사장직을 물려주는 것이었다.

새로운 대제사장은 이세트 공주를 보필해 왕국을 지켜낼 수 있는 자여야 했다.

나는 고심해서 선출한 새 대제사장을 왕과 공주에게 소개한 후 최소한의 짐만을 꾸려 조국을 등지고 나아갔다.

저 머나먼 영웅의 길로….

 

 

(스토리 태양의 왕국 완료)

(저무는 태양 스토리로 이어짐)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