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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왕국 스토리에서 이어짐)

 

 

# 로체스트 로나운 성채

 

브린 : …이상하군요. 타라타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목을 왕의 근위병들이 죄다 막아서고 있습니다.

먼저 공격해오지 않는 걸 보니 단순히 행로를 차단하려는 목적만을 띠고 있는 듯합니다만….

 

[…밀레드.]

 

브린 : 예, 저도 같은 생각을 하던 참입니다.

당신의 말처럼 어쩌면 그는 당신이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일순간 지면에 강한 진동이 일어나고 벽돌이 일거에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브린 : …!

플레이어. 저것 좀 보십시오…!

 

(브린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무너진 성의 윤곽. 그리고 돌 틈을 군데군데 비집고 나온 용암용암석이 보인다.)

 

브린 : 저긴 왕의 알현실이 있는 왕성 중심부 아닙니까?

아까부터 얕게 흐르던 진동과 주위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게다가 이제는 용암석까지….

아무래도 왕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성대한 연회를 준비 중인가 봅니다.

 

[…어딘가 익숙하다.]

 

브린 : …저 용암이 말입니까? 당신이 익숙하다고 하니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해집니다.

우리도 왕의 환대에 응할 준비를 철저히 해야만 하겠습니다.

…아까부터 뒤쪽에서 잡담에 열중하고 있는 노친네들과는 달리 말입니다.

 

…….

 

스피노스 : …….

 

리엘 : 영웅의 인도자를 만나 네 왕국을 떠나고 긴 여정에 나섰다. 그래서 다음은 뭔데?

 

스피노스 : …….

태양의 왕국을 떠나 이교의 신을 따르고 세상을 구하는 일은 나름대로 보람찼다.

태양을 닮은 고결한 엘프우스운 행색의 비상한 연금술사.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건 내게 있어 새로운 즐거움이었지.

여행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하마터면 거의 조국을 잊을 뻔했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경험과 자극으로 가득했으니.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곧 나의 메마른 땅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이 복잡하고 환멸 나는 세상에 대해 알면 알아갈수록 오히려 고향에 대한 향수가 짙어져 갔지.

무엇보다도 빛의 인도자, 다우나.

굳건하고 용맹한 그를 보고 있자면 왜인지 왕국을 지키겠노라 선언하던 이세트 공주가 떠올랐다.

조국으로부터 도망쳤던 난 영웅의 길을 걷는 내내 공주님께 질책 받는 기분이었지.

그래서 나는 영웅의 신관으로서 부여받은 모든 임무가 끝나자마자 즉시 조국으로 향했다.

돌아가면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제대로 보필해 왕국을 지키리라.

후회에서 비롯된 다짐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향한 희망이 가슴 깊이 샘솟았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애타게 달려 마침내 도착한 나의 고향, 나의 조국은….

…….

이미….

 

…….

…….

 

이세트 : 스피노스가 떠나고 새로운 대제사장이 임명되고 난 뒤

나는 태양신의 계시가 내리는 빈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걸 느꼈어.

그리고 그걸 조짐으로 시작해 왕국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 왕국의 역사를 퇴보시키는 끔찍한 변화들이….

 

노인 : 아아, 폐하…! 부디 자비를…!
태양신이시여, 부디 저를 지켜주소서!

모하드의 왕 : 네 이놈, 시끄럽다! 아직도 우상을 부르짖느냐!
안 되겠구나. 오늘 내 직접 네놈의 피를 보고 말 것이다!

노인 : …으아악…!

 

이세트 : 손에 들린 외날 도검과 하얀 옷에 피를 묻힌 채 눈을 번뜩이던 아버지가 말했어.

 

모하드의 왕 : …수도를 지하로 옮겨야겠다.

무녀 이세트 :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모하드의 왕 : 요사이 모하드의 국력과 왕권이 서서히 약화하여가는 이유를 모르겠느냐?
바로 두 개의 태양을 섬기는 이들 때문이니라.
밝은 하늘 아래에 있기 때문에 두 개의 태양을 섬기는 자가 창궐하는 것이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선 다를 것이다.
빛이 들지 않는 지하에선 비로소 누가 진정한 태양인지 만백성이 알게 되리라.
이세트, 내일 아침 제례에서 선포할 계시를 준비하거라.
나 진정한 태양이 고하노니 모하드 왕국의 수도를 지하로 천도하여 왕국을 쇄신하고 부흥을 꾀하리라.

무녀 이세트 : …!

태양의 대제사장 : …….

 

이세트 : 난 아버지의 요구를 거부했어. 그런 말도 안 되는 계시는 내릴 수 없다며 저항했지.

그러나 아버진 막무가내였어. 광증을 보이며 길길이 날뛰다 제 분에 못 이겨 손찌검을 하고 검을 휘두르셨지.

결국 다음 날 나는 파랗게 멍든 얼굴과 몸을 황금 베일로 가린 채 아버지의 계시를 선포하고 말았어.

…….

백성 모두가 작열하는 태양 아래 부질없이 사막의 모래를 퍼냈어.

고작 나의 한마디 때문에…. 수많은 목숨이 모래바람 속에 부스러졌지.

밤낮없이 이어진 대공사로 건축물이 제 형태를 찾아가는 속도만큼 황량한 공터엔 바싹 마른 시체가 빠르게 쌓여갔어.

…백성을, 왕국을 지키지 못했다는 무거운 죄책감에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

그리고 어느 밤.

 

하반 : …….

무녀 이세트 : …하반….

 

이세트 : 하반은 시체 더미 앞에서 말없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어. 그의 앞엔 이미 수분이 말라버린 세 구의 시체가

있었지. 그제야 난 기억해 냈어. 하반의 가족이 세 명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

마침내 난 아버지에게 맞서 반란을 일으켰어.

백성들을 다시 태양 아래로 돌려보내기 위해 미친 왕을 경계하던 이들을 규합했지.

 

무녀 이세트 : 왕은 자신의 탐욕을 위해 태양을 버리고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태양 아래로 돌아가야 합니다! 태양의 후손들이여, 일어서십시오!

하반 : 우오오…!

태양의 대제사장 : 태양의 무녀께서 우리 반군을 축복하사 평화로 인도하시리…!

사람들 : 태양의 무녀, 만세! 만세! 만세!

 

이세트 : 하반신임 대제사장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나와 뜻을 함께해 주었어.

반란군의 세는 빠르게 불어나 금세 왕가와 맞설 힘을 가지게 되었지.

급변하는 정세를 보며 아버지는 조급했던 모양이야.

별안간 동쪽의 외세를 끌어들이더니 금은보화로 유혹하며 자신의 백성을 학살하라 종용했어.

보호해야 할 백성들의 목숨에 되레 가격을 매기고 살육을 부추긴 거야.

목숨 값을 탐하는 잔학무도한 야만이들의 칼 앞에 힘없는 백성들은 쓰러지고….

곧 나 또한…, 머리채를 잡혀 개처럼 땅바닥에 내팽개쳐졌어.

 

무녀 이세트 : …으윽…!

야만인 전사 : 네가 말했던 개를 잡아 왔다. 이제 약속한 보수를 다오.

태양의 대제사장 : …….

무녀 이세트 : …너, 너는…!!!
…이 더러운 배신자….

태양의 대제사장 : 개가 더는 꼬리를 흔들지 않고 주인을 물기까지 한다면 이 이상 도축 밖에는 답이 없지요.
후후, 걱정 마세요. 폐하께선 백성이 피를 흘리는 걸 원치 않으신답니다.
당신 하나만으로 수백수천의 백성을 지킬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간단한 셈법입니까?

하반 : …우어어!!! 우오오오!!! 우오오오오!!!!!

태양의 대제사장 : 저쪽에 또 한 마리의 개가 목놓아 짖는군요.
그거 아십니까? 공주님. 저 자는 당신이 아니라 자신이 반란군의 수장이라며 애달프게 짖는 거랍니다.
공주님은 왕족이니 목숨만은 건질 거라 믿고 모든 걸 뒤집어쓰려는 거겠지요.

무녀 이세트 : 하반….

태양의 대제사장 : 저 반역자는 당신의 최후를 보지 못할 거랍니다.
제 주제도 모르는 천한 반역자에게 연모하는 이의 끝을 보여주는 건 너무도 큰 호사니까요.
죽음 너머에서 둘이 재회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무녀 이세트 : …….
아아….

 

이세트 : 나는 왕족이라는 이유로 처형 대신 사약을 받았어.

그리고 하반…. 그는 내가 사약을 마시는 내내 저편에서 울부짖었지.

나를 보지 못하도록 두 눈이 뽑히고 더는 날뛰지 못하도록 두 다리가 잘려 나갔는데도 하염없이.

아마도 끝까지 날 보호하지 못한 게 가슴 아팠던 거겠지. 그는 정말로 사력을 다해 나를 지키려 했거든.

그 서글프고 다정한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나는 서서히 가라앉았어. 영원한 잠 속으로.

아득하리만치 깊은 원한과 분노 속으로….

그리고 이후, 푸른 수정의 부름으로 죽음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벌어진 일들….

그건 모두 네가 아는 그대로야. 밀레드….

 

…….

…….

 

스피노스 : …….

패망한 조국의 잔해 앞에서 얼마 동안 황망히 서 있었을까.

일대의 나그네로부터 패망 직전 조국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모하드의 공주가 미친 왕에게 맞서 반기를 들었고 그 죄로 인해 죽었다….

그리고 더는 제어할 이가 없어진 미친 왕은 지하 도시 건설을 지속하며 폭정을 일삼다가,

태양신의 징벌처럼 연이어 불어닥친 거대한 모래 폭풍에 휘말려 죽고 말았다….

 

리엘 : 흥. 바보 멍청이 왕이로구먼.

 

스피노스 : …….

나의 조국은 초라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이세트 공주 같은 올바른 자가 있었는데도….

결국 부패와 광기를 막은 건 일개 인간이 아니라 태양신의 분노였다. 그러니….

 

리엘 : 그러니까 어차피 무너질 국가는 어떤 수를 써도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있다. 이 말이야?

 

스피노스 : 그렇다. 일개 인간은 정해진 결과 앞에 무력할 뿐.

오직 태양처럼 찬란한 빛의 인도자, 빛의 힘만이 유효한 것이다.

 

리엘 : 그럼 네 논리는 지금 우리가 협력하려는 일들. 친구와 제자가 하려는 일이 전부 허사일 거라는 뜻이네. 그렇지?

 

스피노스 : …그래,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

 

리엘 : …….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리엘은 주먹을 들어 스피노스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스피노스 : …! 뭐 하는 짓인가, 리엘?!

 

리엘 : 듣자 듣자 하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러니까 네가 바보라는 거야, 이 바보야. 벌어진 현상이 있어도 읽지를 못하는데 오래 살아서 뭐해?

더는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다가올 일들을 지켜봐. 젊은이들이 어떻게 시련에 맞서는지 보란 말이야.

아까 제자 말처럼 사기나 꺾지 말고. 알았어?!

 

스피노스 : …….

 

…….

 

브린 : 말씀들은 다 나누셨습니까? 전장에서도 사이좋게 아웅다웅하시니 이게 바로 연륜의 차인가 싶었습니다.

 

리엘 : 히히. 늙어서 좋은 점도 있지? 너도 나중에 늙으면 이렇게 돼!

 

브린 : …끄응.

어쨌든 여기서부터는 병사들을 대기시키고 저와 플레이어가 먼저 앞서가겠습니다.

용암석 때문에 왕성 곳곳이 붕괴하고 있으니 붙어 있다간 다 같이 잔해에 휩쓸리고 말 겁니다.

 

리엘 : 그래, 그래. 우리는 천천히 따라갈게. 아무 걱정 마! 히히히.

 

스피노스 : …….

 

브린 : …좋습니다.

그럼, 갑시다. 플레이어. 왕이 우리를 기다리는 곳, 왕성 알현실로요.

 

…….

…….

 

밀레드 : …하아…, 하아….

 

이세트 : 괜찮아, 밀레드?

 

(이세트가 밀레드의 머리에 돋아난 뿔을 어루만지려 하자 밀레드는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이세트 : …….

 

밀레드 : …그래서, 네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게 뭐지?

내가 네 아버지, 모하드의 미친 왕과 닮았다고 하고 싶은 건가?

 

이세트 : 아냐, 그 반대야. 밀레드.

넌, 와 닮았어. 놀라울 만큼 많은 것이.

 

밀레드 : …뭐…?

 

이세트 : 우리 둘의 인생은 마치 반으로 접힌 종이 위에 포개어진 물감과 같아.

왕족으로 태어나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하고 불현듯 죽음에서 깨어나선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랑하는 이를 갈구하는

운명. 우리가 이렇듯 서로에게 이끌렸던 이유도 다 이 때문이었을 거야.

 

밀레드 : …….

 

이세트 : 하지만 네 이야기의 결말마저 나와 똑같아질 필요는 없어.

난 너와 플레이어를 통해 깨달았어.

이미 떠나간 이를 붙잡고 흘러간 시간을 되돌리려 할수록 더 큰 상처가 생길 뿐이라는걸.

주변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것도 모자라 자기 자신마저 상처 입힌다는 걸 말이야….

…그리고 너는 이미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

 

밀레드 : …….

…결국 넌 잠시나마 하반을 이 세상에 불러왔잖아?

뒤늦게 작별 인사라도 나눌 수 있었으니까 그런 배부른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난…, 누나와 작별 인사를 할 시간조차 없었어.

 

이세트 : …밀레드.

 

밀레드 : 그리고…. 이전에도 말했듯이 내게도 계획이 있어. …그걸 위해서라도 반드시 플레이어와 마주해야만 해.

네가 이 싸움을 원하고 원하지 않고는 관계없어.

 

이세트 : …….

…그렇겠지.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으니까.

…….

곧 때가 오겠구나….

 

밀레드 : …?

…! 플레이어가 가까워졌군. 요동치는 용암으로 느낄 수 있어.

그리고 때마침…. 오랜 친구를 맞이할 채비도 끝난 것 같아.

 

(밀레드의 눈동자와 손끝에서 푸른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가 손짓하자 이세트의 앞에 검붉은 문이 열렸다.)

 

밀레드 : …자, 그럼.

이제 잠시 물러나 있어. 이세트. 이건 네 싸움이 아니니까.

 

이세트 : 윽…!

밀레드…! 안돼…!

네 근처에 내가 없으면 너는…!!! 너는…!!!

 

(그러나 밀레드에게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이세트를 감싸고,)

(뒤이어 이세트는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밀레드 : …….

…통증이 점점 심해져 온다…. 그러나 플레이어에게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지….

계획에…, 차질이 생겨선 안 되니까….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기다리는 거야….

…후후. 후후후….

 

 

(스토리 저무는 태양 완료)

(죽음의 변증법 스토리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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