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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험치 3,540,000

: 골드 57,000


 

(타라타 도심 스토리에서 이어짐)

 

 

# 로체스트 로나운 성채

 

(법황청 산하 마법 연구 기관.)

 

밀레드 : …….

간신히 잠입했어…. 그래도 다행히 기관 내부는 바깥에 비해 경계가 훨씬 느슨하군.

거리에선 폭도들이 타라타를 휘젓고 다닌다며 난리인데도 말이야.

 

브린 : 마법사들을 모아놓은 기관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마법사란 족속은 외부 일이야 어떻든 자기 연구가 가장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내부에 감시자들을 깔아두면 연구가 잘 될 리 없지 않습니까.

누가 제멋대로 연구실을 휘젓고 다닌다 치면 칠색 팔색 하며 역정을 낼 겁니다. 저라도 그렇게 할 거고요.

 

밀레드 : 그렇군. 마법사인 네가 하는 말이니 꽤 신빙성이 있네.

 

브린 : 예, 뭐. 마법사의 기본 사고방식이란 게 다 거기서 거기니까요.

흠….

 

(브린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브린 : …주위에 사람이 몇몇 있긴 한데….

다들 자기 머릿속에 갇혀서 우리에겐 관심도 없을 테니 괜한 이목 끌지 않게 조심하며 갑시다.

 

[알았다.]

 

(일행은 거동을 조심하며 찬찬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브린 : 흠….

건물 자체는 좀 낡았지만…. 법황청이 자금을 대는 곳이라 그런지 시설 하나는 연구할 맛이 절로 나게끔 되어있군요.

 

(그때 밀레드가 벽면 하나를 통째로 할애한 어느 기념비 앞에 멈추어 섰다.)

 

밀레드 : …음. 이건 무슨 역사 기념비 같은데. 어디 보자….

법황청 마법 연구 기관은 여신 모리안의 성스러운 기적을 연구한다.

…마법 연구 기관의 표어 같은 건가 봐.

 

브린 : 참나. 성스러운 기적 같은 소리. 마법 연구에까지 종교적 정통성을 부여하느라 아주 애를 쓰는군요.

정작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한 현상들은 이단으로 낙인찍기 바쁘면서 말입니다.

 

밀레드 : …….

저 성스러운 기적이라는 표어 아래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당한 걸까….

에이레 누나….

 

브린 : …….

…….

…….

 

(브린은 기념비의 어느 부분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밀레드 : …뭐가 더 있어? 브린?

 

브린 : …아, 이 아래쪽에 마법 연구 기관의 연표나 인명 명단 기록이 있길래 한번 훑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익숙한 이름이 있을까 해서요.

 

밀레드 : 익숙한 이름?

 

브린 : 예. 케흐라는 유명한 법황청 소속 마법사인데 개인적으론 높게 평가하고 있거든요.

플레이어에겐 언뜻 말했던 적도 있으니 알 겁니다.

 

밀레드 : …….

케흐….

 

브린 : …….

…저 때문에 괜히 시간을 지체하게 됐군요. 중요한 때인데 사적인 흥미를 채워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저 같은 촌구석 마법사가 이런 곳에 들락거릴 기회가 많진 않아서요.

서둘러 이 앞을 빨리 벗어나도록 합시다. 여기 소속 마법사 중 기관의 역사에 흥미를 갖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밀레드 : …그래, 알았어. 잠입한 사실을 들키기 전에 어서 쓸모 있는 것들을 찾아내러 가자.

 

…….

…….

 

스피노스 : …….

 

에녹 : …….

왜 그러지? 오랜만에 동지를 만났는데 반갑지 않은가?

 

스피노스 : 한때의 동지가 영원한 동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비켜서십시오.

 

에녹 : 섭섭하군. 서로의 흠결마저 묵인해 주는 사이라면 적어도 그것보다는 더 가까울 줄 알았는데.

베르베에서 우린 같은 목적을 바라보지 않았던가. 각자의 신의 부흥거짓 영웅의 몰락을.

 

스피노스 : …….

 

레무 : 그럼 레무는 가볼게요. 또 봐요.

…….
….

? : 죄책감도 없는가.

스피노스 : 무엇 말씀입니까?

? : 저렇게 어린아이를 이용하는 것 말이다.

스피노스 : 당신도 이용당하는 처지면서 남을 걱정합니까.

에녹 : 그분은… 날 이용하는 게 아니야.

스피노스 : 저 어린 그렘린도 같은 말을 하겠지요. 그런 겁니다.

에녹 : …….

 

에녹 : 이후 네가 쓰다 버린 어린 그렘린은 내가 따로 돌봐주었다. 내가…, 보기보다 아이를 잘 다루거든.

제 신을 위해선 무엇이든 쓰다 버리는 습성은 여전한가?

 

스피노스 : 당신에게서 그런 소리를 듣다니 기가 차는군요.

베르베에서의 동맹일시적이었습니다.

서로의 신, 그 앞길에 영웅이라는 공통된 방해물이 있었으니 같이 행동하는 게 효율적이었죠.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빛의 인도자와 여신 마하가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었으니 당신 또한 빛의 인도자의 적일뿐이란 말입니다.

비키십시오, 에녹. 내게 있어 빛의 인도자를 배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에녹 : 그렇겠지. 그러나 여신님께선 팔라라를 해치지 않으셨다.

 

스피노스 : …….

…뭐라고요…?

 

에녹 : 들었던 대로다. 여신님께선 팔라라를 해치지 않으셨다.

넌 지금 루 라바다를 찾기 위해 여신님께로 향하고 있던 길이지.

그러나 그는 이미 대성당에 없다. 지극히 평화적인 방법으로 여신님께서 그를 타라타 왕성 바깥으로 내보내셨지.

지금 그의 갑옷엔 티끌만 한 생채기조차 없을 거다.

이래도 옛 동지와의 해후가 배반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 안 그런가?

 

스피노스 : …….

아….

…….

…무사하셨나…. …빛의 인도자시여….

 

(스피노스는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스피노스 : …….

…….

…오로지 빛의 인도자만을 위해…. 그분의 안위만을 위해 저 거짓 영웅 일행과 합류했습니다.

그런데 애초부터 그럴 필요가 없었다니….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고 그런 지옥 같은 광경과 마주해야 했던 겁니까….

…….

…어느 멍청한 애송이 하나 때문에 이세트 공주가 귀하디귀한 목숨을 버리는…. 그런 꼴을 다시 볼 줄 알았으면….

차라리 조국이 멸망하던 날 함께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에녹 : …….

 

무녀 이세트 : …됐어. 괜한 변명할 필요는 없다.
오늘 나는 네게 작별을 고하고 각오를 전하러 온 거니까.

대제사장 스피노스 : …각오요?

무녀 이세트 : 그래. 네가 방황하는 동안 내가 태양의 왕국을 지키겠다는 각오.
넓은 세상을 만난 네가 다시 돌아올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돌아올 고향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대제사장 스피노스 : …….

무녀 이세트 : 나는 왕국의 역사가 이대로 무너지도록 두지 않겠어. 절대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스피노스 : …….

지난한 불멸의 삶 내내 단 하루도 공주를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내가 조국으로부터 도망쳤기 때문에 이세트 공주가 죽었다.

그 용서받지 못할 죄를 만회하기 위해 불멸을 택하고 있는 힘껏 빛의 인도자를 모셔왔지요.

빛의 인도자 또한 이세트 공주처럼 빛나는 자. 두 번 다시는 빛나는 자를 잃는 일이 생겨선 안 됐으니까요….

…그렇게 긴 세월을 공주님께 속죄하며 지내오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왕성 알현실에 공주님이 살아서 서 계셨던 겁니다.

내가 도망칠 때 뵈었던 마지막 모습…. 여전히 당당하고 빛나는 모습 그대로요….

…….

…그 모습을 본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압니까?

끝없는 구원. 마치 천년을 무덤 속에 생매장되어 있다가 처음으로 맑은 공기를 마신 것만 같았습니다.

마침내 내게도…, 기회가 찾아온 겁니다. 당신과 조국을 버리고 도망쳐서 죄송하다. 부디 나를 용서해달라.

그렇게 그녀의 안전에 무릎 꿇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 기회가요….

…….

…….

…그런데 그 멍청한 놈이 모든 걸 망쳤습니다. 밀레드…. 그놈 하나 때문에…. 나는 나의 죄를 사해줄 유일한 존재….

나를 이 절망에서 구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를 눈앞에서 영원히 잃었단 말입니다….

 

에녹 : …넌 태양의 공주를 숭배했던 거군. 네가 지금 팔라라를 숭배하는 것 그 이상으로.

팔라라를 향한 네 신앙의 근원도 바로 거기서부터였나….

 

스피노스 : …….

…다들 숭고한 희생이니 운명이니 지껄이며 이세트 공주의 죽음을 추켜세우더군요.

내가 그녀의 뜻을 이어받아야 한다면서요.

…가당치도 않은 소리.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에녹 : 우리 같은 족속은 누굴 모시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지. 주인을 잃는다는 건 곧 삶을 통째로 잃는 것과 같다.

하물며 이미 잃었던 주인을 다시 잃는 건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끔찍한 고통일 테지.

 

스피노스 : …….

 

에녹 : 우린 각자의 신을 위해 참으로 열심히도 봉사하지 않았던가.

서로 다른 신을 모시고 있어도 동지가 될 수 있던 건 바로 그 공통점 때문이지.

팔라라에 대한 네 숭배와 여신 마하에 대한 나의 숭배는 그 본질에 있어 크게 다를 바 없으니.

 

스피노스 : …….

 

에녹 : …….

네 이세트 공주가 그러했듯 나의 여신께서도 내게 구원을 내려주셨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는 오로지 그녀의 안에서만 살아 숨 쉬어왔지.

…어떤가. 스피노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보지 않겠나. 신에게 모든 걸 바치기로 결심한 어느 신도의 이야기를.

붉은 여신이 구원한 어느 초라한 남자의 간증을 말이다….

 

…….

…….

 

밀레드 : …….

 

브린 : …….

뭐 좀 찾았습니까? 플레이어, 밀레드?

 

[…아직.]

 

밀레드 : …마찬가지야.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에녹과 관련된 자료량은 턱없이 적어.

전공이 마족 지배술이라는 내용 외에는 신상 기록이나 행적도 모호한 데다….

특히 생체 실험이나 게아스 같은 연구의 흔적은 아예 찾아볼 수조차 없고.

…이것도 에녹이 우리가 올 걸 대비하고 미리 손을 써놓은 거라 봐야 할까?

 

브린 : …그럴 수도….

아니면 수면 아래에서 은밀하게 행하는 일이니만큼 소수의 관련자만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걸 수도요.

지저의 실험실에서처럼 일 처리가 허술했다면 좋았겠지만…. 역시나 법황청은 법황청이군요.

그때는 운 좋게도 일시에 여러 정보를 얻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이번엔 그런 운을 기대하기가 어렵겠습니다.

 

밀레드 : …이 기관 안엔 이런 서고가 몇 개는 더 있을 거야.

이렇게 계속 막연하게 불특정한 서류만 뒤적여선 답이 없겠어….

무언가…, 더 범위를 좁힐 수 있을 만한 실마리가 없을까….

…….

……! …케흐.

 

브린 : 케흐? 갑자기 그는 왜요?

 

밀레드 :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다 싶었는데 인제야 막 기억이 났거든. 케흐, 그에 대한 이야기가.

 

브린 : …?!

 

밀레드 : 난 그를 직접 만났던 적이 있어. 비록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플레이어, 그리고 키안과 그의 최후를 지켜봤었지.

 

브린 : …최후…? 케흐, 그가 죽었단 말입니까…? 어떻게요…?!

 

[(저거노트에 대해 설명한다.)]


29차 실험.

영혼이란 존재하는가?
인간에게 영혼이 존재한다고 치면 신에게도 영혼이 존재하는가?

1. 목인에 신의 영혼을 담으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2. 작은 생물에게 담으려는 시도도 실패했다.

이번에는 살아있는 인간을 그릇으로 삼으려 한다.
안누빈으로의 문이 열리면 내 몸으로 신이 들어올 것이다.

아마 이 일지는 이어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
키안이 보고 싶다.

 

브린 : …….

…….

키안은 바로 케흐의 동생이었고….

케흐는 신의 부활에 대한 생체 실험을 거듭하다가 결국엔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괴물이 되었단 겁니까….

…….

…….

…어디 처박혀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줄만 알았는데 그런 일에 목숨을 걸었던 거군요.

결국 그 실험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는 제 눈으로 직접 보지도 못할 거면서….

…하여간 마법사라는 족속은 왜 다 그 모양인지 모르겠습니다….

…….

…….

…아. 그렇군요. 밀레드. 당신이 케흐를 왜 입에 올렸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습니다.

 

밀레드 : …응, 눈치챘구나.

 

브린 : 케흐, 에녹. 이 두 사람에겐 몇 가지 유사점이 있습니다.

둘 다 동시대의 법황청의 마법사이면서 어느 순간 자신의 전공 분야를 젖혀두고 생체 실험에 주력하기 시작했죠.

서로 추구하는 목표가 같았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 유사점이라면 둘 사이에 연구와 관련한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밀레드 : 응. 그러니 케흐에 대한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분명 에녹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브린 : …예. 그럼 방향이 정해졌으니 움직여봅시다.

케흐에녹, 두 법황청 소속 마법사 간의 연결고리를 찾는 겁니다.

 

…….

…….

 

에녹 : …….

너는 인생을 뒤바꿔놓을 만한 순간과 마주한 적이 있나?

자신이 알던 모든 것이 초월적 존재에 의해 새롭게 정의되는 순간 말이다.

간증하건대 내게는 있었다. 어떤 단어로도 묘사할 수 없는 그 신비한 순간이….

 

…….

….

 

아이들 : 회색 인간이야…. 무서워….

 

아이들 : 저게 인간이라고? 차라리 시궁쥐와 동족이라면 믿겠다.

 

아이들 : 추악한 에녹. 끔찍한 에녹. 추잡한 짓거리로 태어난 마족의 자식.

 

…그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 부모가 누구인지, 자기 고향이 어딘지. 제 뿌리에 대한 기억도 전혀 없었다.

그는 소년 시절을 법황청 부설 보육 시설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도 아주 골칫거리 취급을 받았다.

그건 마족임을 의심케 할 정도로 유달리 이질적인 무채색 외형 때문이기도,

또 아이 같지 않게 냉정하고 피를 무서워하지 않는 무감각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탓에 그의 마음엔 항상 근원적인 질문이 따라다녔다.

정말로 나는 마족의 자식일까?

그 질문을 들으면 보육원의 무녀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답하곤 했다.

 

무녀 : 그 답은 오직 여신만이 알 게다. 에녹.

 

그러나 그는 여신의 답을 기다릴 만큼 아둔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육원의 그 누구보다도 머리가 좋았다.

그래서 그는 답을 기다리는 대신 자기 힘으로 직접 질문의 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곧 다른 대상과 나의 차이를 직접 비교 확인하는 과감한 시도에 나섰다.

 

낮이든 밤이든 틈이 날 때마다 그는 몰래 구한 예리한 날붙이로 생물을 갈랐다.

가끔은 장난삼아 흩어진 조각들을 퍼즐처럼 이어 붙이기도 했다.

시궁창에 떠도는 짐승, 아직 안치되지 못한 죽은 자들. 심지어는 자신까지도 표본으로 삼았다.

…베인 자국에 고여든 맑은 피와 붉은 살. 생동감 있게 팔딱이는 신체.

일단 피부를 가르고 나면 눈앞의 생물이나 무채색 피부를 가진 그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모두가 똑같이 피와 살을 지닌 생물체였던 것이다. 이 당연한 사실이 소년에겐 큰 위로가 되었다.

모두가 마족의 자식이라며 그를 경멸했지만 이 실험의 결과만큼은 그가 마족이 아님을 증명해 주었기에.

그래서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과 시시각각 닥쳐오는 외로움을 피해 그는 더욱더 실험에 몰두했다.

이 비밀스러운 실험은 곧 소년의 취미를 넘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장성하여 보육원을 벗어날 때까지 반복되었다.

 

그는 비상한 두뇌를 인정받아 법황청 부설 학교에 입학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도 그는 인간과 마족을 향한 흥미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행동을 넘어 제법 진지한 지적 욕구를 느끼던 참이었다.

인간도 마족도 아닌 생명체를 직접 탄생시켜보고 싶다.

그의 무채색 피부 너머로 그런 혈기로운 열정이 들끓고 있었다.

 

주교 : …교내의 학도들은 겸허히 몸을 낮춰 여신 앞에 경배하라.

에린의 강림을 위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성심껏 기도하라.

 

에녹 : …부디 제게 생명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허락하소서.

 

아직은 신기루에 불과한 소망을 위해 그는 여신 앞에 몸을 낮춰 기도했다.

 

일과가 끝나고 나면 그는 서고에 처박혀 생명체에 대한 수많은 자료를 읽고 또 읽었다.

우등생의 권한을 내세워 일반 학생은 쉬이 접할 수 없는 고서까지도 게걸스럽게 탐독했다.

그리고 이내 법황청 내에 전해지는 마족 지배술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마법이라니. 망치로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생명체를 움직이게 하는 건 결국 정신이 아니던가.

이 원리를 습득하기만 한다면 소망에도 한발 다가갈 수 있으리라….

마법에 대한 기초 지식이 전무함에 개의치 않고 그는 열성을 다해 마족 지배술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졸업을 앞둘 무렵. 마침내 그의 마족 지배술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이제는 직접 대상에게 시험을 해볼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른 것이다.

정말로 자신의 지배술이 효험이 있는지 검증하려면 제대로 된 실험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의 주위엔 시험 대상으로 삼을 마족이 전혀 없었다.

조잡한 수준의 마법이니만큼 인간에게 마족 지배술을 적용해 보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고심하던 그에게 어느 솔깃한 정보가 들려왔다.

바로 개체를 마족화할 수 있는 약초의 표본이 성당 내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금지된 약초로 짐승을 마족화해 이를 지배 대상으로 삼는다면 어떨까.

마족을 만날 수 없는 지금으로선 그것만이 마법 연구를 진보시킬 유일한 대안이었다.

결심이 서자 그는 즉시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창고에 침입했다.

그리고 보관되어 있던 약초 표본을 훔쳐내 인근 거리로 달려 나가

근처 거리를 배회하는 떠돌이 거지를 납치해 서슴없이 약초를 먹였다….

….

------.

 

실험은 성공이었다. 마족화한 인간은 내 명에 완벽히 복종했다.

빙글빙글 돌고, 제자리에서 뛰고, 심지어는 자신을 상처 입히기까지 했다. 정말이지 엄청난 성취였다.

비록 온전한 마족의 육체는 아니지만 마족의 정신을 통제했으니 육체를 지배할 날도 곧 머지않았다.

강렬한 환희에 젖은 그는 깃 펜을 들고 실험의 경과를 하나하나 적어 내려갔다.

…그때였다.

 

주교 : …이…, 이게 다 무어란 말이냐….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게냐…. 에녹.

 

에녹 : ……….

 

…지나치게 흥분한 탓에 뒤처리가 미흡했던 게 분명했다.

아니면 그가 불경한 행위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제서야 드러났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실험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다. 그리고 모든 실험 자료를 압수당한 채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의 죄는 단순하지 않았다.

금지된 약초에 접근해 무단으로 민간인을 마족화하고 실험 대상으로 삼은 죄.

이단자로서 즉결 처분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내게 내려진 처분은 제적이었다.

공개적으로 강도 높은 처벌이 이루어지면 그의 불경한 죄악이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되어

오히려 사회에 혼란을 초래한다는 명분이었다.

당황하거나 기뻐할새조차도 없이 그는 목숨을 건지고 아무런 오명이나 전과 없이

다시 세상에 발 디딜 수 있게 되었다.

실로 여신의 기적이었다.

 

파면 이후 그는 완전히 마법사로 전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법황청의 부름을 받았다. 이번엔 학도가 아닌 법황청 소속 마법사로서였다.

법황이 그가 독학만으로 마족 지배술을 익힌 사실 자체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마족 지배술은 법황청에서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인 고도의 마법이었던 것이다.

두 팔 벌려 새 마법사를 맞이한 법황은 마족 지배술 연구를 지시하고 자유로운 연구를 보장해 주었다.

실권자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에 엄청난 규모의 지원도 뒤따랐다.

내 불미스러운 과거 따윈 이미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케흐 : 이거 굉장하군. 법황청 역사상 이 정도 지원을 받는 마법사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야.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에르그 연구 대신 마족 지배술이나 파볼 걸 그랬군.

 

에녹 : 에르그 연구의 권위자라고 명성이 드높은 자가 귀찮은 소리나 해대는군.

 

케흐 : 다 부러워서 하는 소리다. 부러워서.

이 정도 지원이라면 법황청의 지시 외에도 네가 정말로 하고픈 연구를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 앞으로 넌 뭘 할 생각이지, 에녹?

 

에녹 : 인간도 마족도 아닌 생명체를 직접 탄생시켜보고 싶다.

이 오랜 목표를 이룰 생각이다.

 

케흐 : 인간도 마족도 아닌 생명체의 탄생이라…. 법황청의 마법사치고는 너무 불경한 목표 아닌가?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널 돕고 싶어지는군. 내 목표도 너와 마찬가지로 불경하니까.

어쩌면 우린 서로의 연구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듯하군.

 

에르그 선구자였던 동료 마법사는 그에게 진실한 호의를 보인 유일한 사람이자

그의 잿빛 꿈을 현실로 그려낼 깊은 지식과 넓은 시야를 지닌 자였다.

동지와의 만남으로 오랜 꿈이 더욱 공고해지자 그는 곧 손끝에 닿을듯한 일생의 목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연구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

그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연구는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몇 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제자리걸음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실험체들의 겉모습은 정교해져갔지만 정작 그들이 생명을 얻어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마족 지배술은 견고해져갔지만 정작 실험체들에 정신을 불어넣을 순 없었다.

이유를 밝히려 아무리 애를 써도 실험실엔 인간도 마족도 아닌 쓰레기 같은 실패작들이 쌓여만 갔다.

 

초조해진 그는 자신이 뭘 놓쳤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더 많은 생물을 가르기 시작했다.

밤낮으로 실험에 매진하며 두 손에 마족, 짐승, 인간의 피를 수없이 묻혀댔다.

…그러자 이번엔 동지가 그에게 등을 돌렸다.

 

케흐 : …실험실에 피 냄새가 진동하는군. 오늘은 몇이나 죽인 거지?

 

에녹 : 필요한 만큼.

…왜 그러지? 너도 이젠 높으신 분들처럼 내가 얼마나 많은 표본을 낭비했는지 세어보려는 건가?

 

케흐 : …아니. 난 네가 하루에 너무 많은 생명을 죽이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에녹 : 그게 무슨 문제인지 모르겠군.

내가 아는 바로는 생물체를 대상으로 실험하는 연구자가 비단 나 하나뿐만은 아닐 텐데.

 

케흐 : …그래. 나도…, 너와 마찬가지로 생체 표본을 다루지.

하지만 나는 적어도 내가 실험으로 앗아가는 생명의 무게를 이해하고 있어.

최소한 그들에게 미안한 감정, 양심의 가책 정도는 가지고 있단 말이다!

그런데 너는 어떻지…?

마족, 동물을 난자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멀쩡한 목숨을 돈으로 사 실험 대상으로 쓰고 있질 않은가!

그것도 하루에 몇 명씩이나…!

 

에녹 : 자기 의지로 가난과 목숨을 맞바꾼 자들이다.

 

케흐 : …아니, 네가 내몰린 자들에게 돈을 미끼로 죽으라 부추긴 거야….

…….

…….

…넌 변했다, 에녹. 목표를 향한 순수한 열정은 어디 가고 이젠 잔혹한 도살자만이 남았어….

 

에녹 : …사람 보는 눈이 참으로 형편없군. 내가 정말로 변했다고 생각하나, 케흐?

나는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늘 그래왔듯이 나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거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기꺼운 마음으로 손에 칼을 들 것이란 말이다.

 

케흐 : …….

…….

…네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가책도 없는 자인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실험에 협조하지 않았을 거다….

지금이라도 각자의 길을 가자. 에녹.

…네 실험이 뭘 위한 건지, 네가 뭘 위해 이런 연구를 하는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렇게 유일하게 그에게 손 내민 동지가 떠났다.

동지가 떠나고 더는 그를 변호해 줄 사람이 없어지자 그의 평판은 빠르게 추락했다.

연구 기관 내부와 법황청에서도 회의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점차 그의 실험 방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높으신 분들로부터 문책을 당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답변이 고갈돼 고개를 숙여야 하는 상황이 늘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법황청은 그의 연구 지원을 빠르게 거두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고작 실험실 하나와 수많은 실패작뿐이었다.

마족의 자식이라 불리던 무채색 남자를 닮은 처참한 실패작들….

 

케흐 : …네 실험이 뭘 위한 건지, 네가 뭘 위해 이런 연구를 하는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에녹 : …….

…….

 

그는 홀로 실험실에 앉아 있었다.

빛 하나 들지 않는 실험실은 실패자가 좌절을 곱씹기에 참으로 적합한 환경이 아닐 수 없었다.

자정이 넘었지만 여전히 말똥한 눈으로 그는 실패작들을 하나하나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어,

인간도 마족도 아닌 생명체를 직접 탄생시켜보고 싶다.

이 실패한 꿈이 이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깨닫고 말았다.

 

돌아보면 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의 인생은 언제나 똑같은 질문의 연속이었다.

정말로 나는 마족의 자식일까?

보육원의 아이들로부터 쏟아지던 경멸과 조롱 앞에서 자신이 마족의 자식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부정당한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든 증명해 내기 위해 그토록 애써 자신과 비슷한 것들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거다.

마치 자신처럼 인간 취급받지 못하는 그 무언가를.

…이 얼마나 초라한 목표인지.

촉망받는 마법사로서 그 어떤 영광스러운 성취를 이뤄내도 결국 그는 언제나 경멸 받는 소년일 뿐이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무채색 인간일 뿐이었다….

 

…이제는 인정할 때였다. 자신의 초라한 목표와 당연한 실패.

그리고 영원히 존재를 부정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

 

의문의 여성 : 아, 하나같이 어설프고 흉측한 부산물이군.

 

에녹 : …!

 

의문의 여성 : 원리도 모르고 흉내만 내려 하니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에녹 : …….

…여긴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다가왔다.)

 

마하 : 외부인이라, 후후. 이 내가 직접 널 선택했는데도?

 

에녹 : …….

…뭐라고요?

 

마하 : 법황이 왜 네 치부를 감춰주고 널 법황청 마법사로 추대했을까?

젊은 풋내기 마법사에게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특혜가 주어졌을까?

고작 마족 지배술 좀 부렸다고 해서? 넌 똑똑하잖아. 잘 좀 생각해 봐.

 

에녹 : …….

…….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마하 : 후후후….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한 그녀는 실험실을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하 : 흐음. 그거 알아? 이 실험실 안에는 나를 닮은 것들이 참 많다는 거.

 

에녹 : 당신…, 말입니까?

 

마하 : 그래. 뭐랄까, 혼돈스러운 것들이지.

 

에녹 : …저는 이것들이 저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에도 마족에도 속하지 않은 괴상한 생명체 말이죠.

 

마하 : 뭐라고? 아하하하.

 

(뭐가 우스운지 그녀는 한참을 웃다가 이내 말했다.)

 

마하 : 그렇다면 너도 나를 꼭 닮은 셈이군. 안 그래?

 

에녹 : …….

…….

 

마하 : 참 이상하게도 인간들은 자기 뿌리를 알지 못하면 삐뚤어진 방향으로 엇나가곤 하더군.

동물들은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 살아가기 바쁜데 유독 인간만이 그 사실에 집착한단 말이야.

너도 마찬가지야. 넌 네 인생 내내 알량한 질문 하나에 매달려왔지. 정말로 나는 마족의 자식일까?

그런데 그게 대체 뭐가 중요하지?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하냔 말이야.

관점을 바꾸는 거야. 네가 네 뿌리에 얽매여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넌 이미 인간이야.

그 무채색 피부 너머에 붉은 피가 흐르듯 분명한 사실이지. 왜 이미 증명된 사실을 다시 증명하려고 해? 응?

 

에녹 : …….

……!!!

 

마하 : 후후후. 나는 네 열의와 집념이 마음에 들어.

내가 살짝 길을 보여 주기만 한다면 분명히 넌 더 근사한 일을 할 수 있겠지.

더는 초라한 목표에 네 가능성을 발목 잡히지 않도록 내가 도와줄게.

 

에녹 : …….

…….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마하 : 나? 나는 네가 찾아 헤매던 답이야. 에녹.

 

에녹 : …!!!!!!

 

목전의 여인이 천천히 양팔을 들자 그녀의 머리칼을 닮은 눈부신 빛이 시야에 쏟아졌다.

 

분명히 그녀에겐 날개가 없었는데도 어째서인지 내 눈엔 붉은 날개의 환영이 보였다.

귓가엔 그 어린 날 들었던 무녀의 말이 웅웅 울려 퍼졌다.

 

그 답은 오직 여신만이 알 게다. 에녹.

 

에녹 : …….

…….

 

마하 : 자, 어서 칼을 들어. 그리고 찬찬히 들여다봐.

나의 모든 것을. 다음으로 나아갈 길을.

네가 찾던 답이 바로 내 안에, 이 끝없는 혼돈 속에 있어….

 

그 밤 나는 날개 잃은 신을 만났다. 그리고 살아 숨 쉬는 반신의 육체를 직접 연구할 기회를 얻었다.

인간도 마족도 아닌 생명체를 직접 탄생시켜보고 싶다.

정말로 나는 마족의 자식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당하던 자신을 유일하게 알아봐 준 진정한 여신.

인간도 마족도 아닌 생명체인 그녀에게 있었다….

 

그날 이후 기적이 일어났다. 마침내 나의 손끝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체가 탄생한 것이다.

붉은 여신의 체내를 모방하여 만들어낸 생명체.

축복의 산물을 품에 안자 그는 무채색 피부 위로 눈물을 흘리며 영원히 붉은 여인의 소유가 되기로 했다.

자신의 모든 걸 봉헌해 오직 그녀만을, 여신 마하를 열렬히 추종하기로 맹세했다….

 

…….

….

 

스피노스 : …….

…….

연구에 집착하는 마법사를 구원한 여신이라. …그거참 절절하기도 하군요.

물론 그렇다고 당신의 신앙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믿음과 도덕성이 꼭 일치하진 않는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에녹 : 그래. 결국은 승리한 믿음이 도덕의 기준을 만드는 법. 그러니 구태여 속세의 잣대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지.

언젠가 여신님의 세상이 도래하면 그녀의 기준이 곧 세상의 잣대가 될 테니 말이다.

 

스피노스 : …….

솔직하게 말해보십시오. 베르베에선 별말 않더니 이제 와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 이야기를 통해 내게 얻고자 하는 게 뭐냔 말입니다. 당신은 순수한 마음으로 간증이나 할 위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에녹 : 그저 마지막으로 동지에게 내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을 뿐…이라 해도 곧이곧대로 믿을 리 없겠지.

이걸 받아라.

 

(에녹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스피노스에게 건넸다.)

(뒤이어 초록빛으로 빛나는 어느 식물이 붕대 감긴 손바닥 위에 놓였다.)

 

스피노스 : 하, 드디어 본심을 드러내는군요. 이게 무엇인지 압니다. 사람을 조종하는 저급한 잡풀 아닙니까?

나더러 이걸로 뭘 어쩌라는 겁니까. 이걸 먹고 미쳐 날뛰는 괴물이라도 되라는 겁니까?

 

에녹 :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 그러나 네가 그걸 원한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스피노스 : …….

…….

…날 아주 우습게 보는군요. 우린 엄연한 적대 관계입니다.

적당히 맞장구치면서 달래면 내 마음이 약해질 거라 생각한 겁니까?

한때 내가 당신과 협력한 적이 있다고 해서 순순히 술수에 놀아날 줄 알았나 보죠?

 

에녹 : …….

 

스피노스 : …나는 이만 돌아갈 겁니다. 나의 신 빛의 인도자에게로요.

저열한 마무리 덕분에 그나마 있던 해후의 흥마저 다 깨어졌으니까요.

 

(스피노스는 건네받은 게아스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스피노스 : …….

…….

피차 다시는 볼 일이 없길 바랍니다.

 

(그리고 에녹의 앞을 지나쳐 검은 나무 그늘 아래로 사라졌다.)

 

에녹 : …….

…….

…….

 

…….

…….

 

밀레드 : …여기. 케흐가 남긴 각종 보고서와 실험 일지들이야. 이 서고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최대한 찾았어.

 

브린 : 확실히 에녹에 비해선 보존된 자료가 많군요. 대외적으로 유명한 마법사인 덕을 보는군요.

어디 한번 봅시다.

…….

 

(브린은 기록을 신중히 살피기 시작했다.)

 

브린 : 케흐의 자료는 대다수가 에르그 연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특정한 시기엔 마족 지배술 연구

다수 참여한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물론 에녹이 에르그 연구에 참여한 흔적도 있고요.

케흐와 에녹, 둘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자주 교류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둘은 한때 친우 비슷한 관계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특정 시점 이후로 공동 연구가 멈춘 걸로 보아 이후론 갈라선 듯하지만요.

케흐는 법황청 마법사치고 양심적인 인물이었으니 에녹 같은 작자와 교류를 한 것 자체가 신기합니다만….

 

밀레드 : …때론 아주 작은 공통점만으로도 협력 관계가 성립하곤 하니까. 마하 일당과 나처럼….

 

브린 : …예, 매우 비슷한 경우이지 싶습니다.

여기 공동 연구자로 에녹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보고서들이 몇 있습니다.

지배술로 통제 중인 개체에 에르그가 끼치는 영향.

마나를 주입한 신체의 마족 지배술 감응도 분석.

특정한 형질의 마나에만 반응하는 마족 지배술….

대체로 에르그 내 마나를 활용한 마족 지배술의 고도화 관련 연구군요.

서로 연관성 적은 분야의 교류를 통해서 그 둘은 무엇을 검증하고자 했던 걸까요….

 

밀레드 : …혹시 보고서에 에녹이 있을 만한 장소에 대한 정보는 없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건 먼저 에녹의 행방을 특정하는 거야.

 

브린 : 아쉽지만 수상해 보이는 곳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대외에 공개되는 자료라 그런지 비공식적인 실험 장소는 기재되어 있지 않아요.

 

밀레드 : …그렇군.

 

브린 : 뭐, 그래도 장소를 유추해 볼 만한 정황 증거 정도는 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마족 지배술과 관련된 이들의 연구는 거의 생체 실험을 동반했던 모양입니다.

연구 내용상 살아있는 개체를 대상으로 한 실험이 필요했던 거죠.

어림짐작일 뿐이지만 에녹이 개입한 이상 인간 표본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요.

그런데 과연 이 기관 건물처럼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한 장소,

각종 대외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그런 종류의 실험이 버젓이 이루어졌을까요.

이런 식의 실험을 고려한 외부 실험실이 있을 거다,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겁니다.

 

밀레드 : 플레이어와 네가 보았던 지저의 실험실처럼.

 

브린 : 예. 지저의 실험실처럼요.

…일단 여기 자료들은 따로 챙겨두겠습니다. 귀환하고 나면 좀 더 내용을 분석해 봐야겠어요.

 

….

 

브린 : …!

 

밀레드 : …방금 서고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어….

 

(문밖을 향해 숨죽여 귀 기울이자 이미 광장에서 들은 바 있는 어느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인퀴지터 : …근방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목격했다는 증언에 따라 수색을 진행하겠다.

광장에서 일어난 소란을 틈타 이단자들이 대량의 신도들을 납치해갔다.

감히 여신의 발치에서 추악한 인질극을 벌일 셈인지….

 

밀레드 : …들었어…? 신도 대량 납치라니…. 또다시 에녹이….

 

브린 : 제길…. 사람들을 이용해서 우릴 흔들어 놓을 요량이군요. 신도들을 납치해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지….

 

밀레드 : …한시라도 빨리 에녹을 찾아야 해. 우리 때문에 희생자가 생기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어.

 

브린 :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놈을 막기 위해선 일단 여길 안전히 벗어나야 해요.

우리가 잠입했던 경로 쪽 상황은 어떻습니까, 밀레드?

 

밀레드 : …….

 

(밀레드는 창문 밖을 슬쩍 바라보았다.)

 

밀레드 : …썩 좋지 않아. 기관 일대를 병력이 둘러싸고 있어. 아까처럼 발각되지 않기를 기대하긴 어려워 보여.

 

브린 : …곤란하게 됐군요. 인퀴지터 자체는 이미 플레이어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만….

이곳에서 충돌이라도 발생하게 된다면 훗날 이들의 악행을 드러내기 위해 꼭 보존되어야만 할 자료들이

영구히 파기될지도 몰라요.

 

밀레드 : …….

네 말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 : …이게 대체 무슨 소란들입니까. 어서 물러나시지요.

 

인퀴지터 : …! 당신은….

 

(당혹스러워하는 인퀴지터의 음성에 이어 문 앞의 인기척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이 조용해질 무렵 서고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 : …….

 

타메인 : 혹여 여기 계신다면 이제 나오셔도 괜찮습니다.

 

[타메인…!]

 

밀레드 : …!

 

브린 : …타메인 주교 대행님 아니십니까?! 여긴 어쩐 일로….

 

타메인 : 일시적으로 병력을 물리긴 했으나 그들이 언제 다시 발을 들일지 모릅니다.

일단 자세한 이야긴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후에 나누시지요. 저를 따라오세요. 어서요.

 

….

 

타메인 : 여긴 고위 사제용 접견실입니다. 병사들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니 일단은 한시름 놓으셔도 됩니다.

 

밀레드 :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고맙습니다.

 

타메인 : 설마 밀레드 폐하이십니까…! 로브를 쓰고 계셔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즉위식에서 뵈었을 때보다 한결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밀레드는 대답 대신 옅게 미소 지었다.)

 

브린 : 그나저나 주교 대행님께선 여기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갑작스레 나타나셔서 적잖이 놀랐습니다.

 

타메인 : 마침 이곳 기관장님과의 접견 약속이 있어 방문한 차였습니다.

폐하를 납치한 폭도가 타라타에 숨어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여러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이렇게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브린 : 예, 정말로 적절한 때에 도움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외람된 말일지 모르겠지만 아직 무사히 주교 대행직에 계시는군요.

주교 대행님께선 저희와 협력 관계인 클레르 사도를 직접 임명하시지 않았습니까?

동맹군이 왕국과 법황청 모두에 전쟁을 선포한 상황인데다 마하도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상황이다 보니….

혹시라도 신변에 문제가 생기셨을까 염려했습니다.

 

타메인 : 그런 걱정이라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외적으로 법황청은 이 전쟁에서 중립을 표명하고 있지요.

입맛에 맞지 않은 언사를 하는 성직자라도 함부로 내치거나 제거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 덕분에 저도 어찌어찌 주교 대행직을 유지하고 있고요. 이전보다야 입지가 훨씬 줄어들긴 했습니다마는.

요즘은 타라타의 성녀께서 사실상 법황 대행이나 마찬가지시니까요.

 

브린 : …그런 상황이군요.

 

타메인 : 한데, 아까 인퀴지터가 언급한 신도 대량 납치…. 정말로 여러분과 관련이 있는 일입니까?

 

밀레드 : …네. 마법사 에녹이 벌인 일입니다. 저희가 여신 마하를 치려는 걸 알고 그녀의 수족이 미리 손을 써두었죠.

 

타메인 : …에녹…. 그는 일전에 절 암살하려고 했던 마법사이지요.

 

브린 : 예, 기억하시는군요. 저흰 이 기관에서 그의 행방을 특정하기 위한 정보를 찾고 있었습니다.

더는 그가 무고한 인명을 해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요.

 

타메인 : 신기하군요. 사실은 저도 그자에 대해 알아보던 중이었습니다.

오늘 이곳에서의 접견 약속도 이를 위해서였지요.

이번에 마법 연구 기관의 기관장으로 새롭게 부임하신 주교님과 오랜 친분이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볼 요량이었거든요.

 

브린 : 그렇습니까…?!

 

타메인 : 예. 그가 한번 제 목숨을 노린 이상 저로서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기관장님께서도 그에 대해 많은 걸 알고 계시진 못했습니다.

저도 주교 대행직만으로는 정보를 취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지요.

에녹 그 자의 연구는 이전부터 마법 연구 기관장이 아닌 법황의 관리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밀레드 : 역시 그랬군요….

 

타메인 : 허나 기관장님의 발언 중에 상기할 만한 내용이 하나 있었습니다.

일전에 기관장님께서 임명되실 적에 여신 마하가 타라타의 성녀를 통해 말했다더군요.

에녹은 도심 인근에 있는 별도 실험실에 주둔하며 직접 여신께 보고를 올리고 있으니

기관장은 에녹의 연구에 일절 관여할 생각 말라고요.

 

[실험실…!]

 

브린 : 도심 인근의 실험실이라고요…?!

…외부 실험실에 대한 우리의 추측이 들어맞았군요. 플레이어, 밀레드.

혹시 정확한 위치도 아십니까?

 

타메인 : 타라타 도심 가까이에 은폐되어 있다고만 들었습니다.

허나 타라타 도심 일대는 전부 번화하여 실험실이 들어설 만한 부지가 마땅치 않을 터인데….

 

밀레드 : …….

…어쩌면…. 도심 인근의 인적이 드문 숲이라면 가능할지도요. 이를테면 셴 마그 숲 같은….

 

브린 : …!

 

타메인 : 셴 마그 숲이라…. 확실히 폐하의 말씀이 그리 허황되지만은 않습니다.

법황청의 요구로 셴 마그에 숲이 조성되기 이전, 그곳에 옛 성당이 하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법황청 초기 모리안 교의 부흥 당시에 건립한 매우 유서 깊고 오래된 성당이지요.

도시 타라타가 발전함에 따라 법황청 본청이 현재의 타라타 대성당으로 이전했고,

이후 방치되어 있던 옛 성당은 숲 조성 사업 때 완전히 철거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브린 : 들었다…,라는 건 결국 철거 사실이 완벽히 확인되지는 않았단 얘기군요.

 

밀레드 : …잠시만요. 방금 법황청의 요구로 숲이 조성되었다 하셨습니까…?

왕성에서는 왕의 사냥터 조성을 위한 숲 조성 사업으로 기록되어 있었는걸요.

 

타메인 : 법황청에서는 초기 종교 부흥의 성지를 기리기 위해 법황의 주도로 숲을 조성했다 전해지고 있습니다만….

도심 인근에 있어도 긴 시간 숲 본연의 모습을 유지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지요.

 

브린 : 일부러 엇갈린 정보를 만들어 왕성과 법황청 어느 측도 숲에 손대지 못하도록 처리해두었군요.

…만일 숲에 아직도 옛 성당이 남아있다면 거기가 실험실로 쓰이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습니다.

거기서 인체 실험을 하든, 지배술을 쓰든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겠군요.

 

밀레드 : …응.

 

브린 : …….

주교 대행님. 위기에서 구해주신 마당에 염치없는 질문이지만 저희가 여기서 나갈 방법도 있겠습니까?

 

타메인 : 물론입니다.

여기 접견실에는 여분의 사제복이 마련되어 있으니 이걸 이용해 여러분께서 제 수행 사제로 위장한다면

인퀴지터의 이목을 끄지 않고도 기관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브린 : …알겠습니다.

 

밀레드 : 도움 고맙습니다. …법황청에 아직 주교 대행님 같은 분이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타메인 : 과찬이십니다, 폐하. 저는 제가 옳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밀레드와 타메인은 가볍게 악수했다.)

 

브린 : 그럼, 갈까요. 밀레드, 플레이어.

 

밀레드 : 좋아. 잡혀간 사람이 다치기 전에 서두르자.

 

(잠시 후 수행 사제로 위장한 일행은 타메인과 접견실을 나섰다.)

 

 

(스토리 어느 간증 완료)

(위대한 사역 스토리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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