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스토리 보상

: 경험치 3,540,000

: 골드 57,000


 

(끝은 같지 않기를 스토리에서 이어짐)

 

 

# 로체스트 로나운 성채

 

(동맹군 본대.)

 

아하센 영주 : 으음….

 

루더렉 : …….

 

아하센 영주 : 노스폴군의 합류 이후 전황이 지속해서 악화하고 있네. 루더렉 총사령관.

첩보에 의하면 노스폴군의 지휘관 로메르플레이어의 손에 쓰러졌다는군.

 

루더렉 : …! 결국 영주의 회유에는 실패했나….

 

아하센 영주 : …어쩐지 노스폴군의 공세가 심상치 않았어.

이 난국을 뒤집기 위해 보낸 선봉대가 오히려 적에게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되었군.

지휘관의 죽음으로 인해 노스폴군의 전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워졌을 걸세.

달아오른 전의는 우리가 모두 짓밟히고 나서야 비로소 식겠지.

그 짧은 새에 히스나이츠 세자르가 개량된 병기를 들고 나타난 것만으로도 기가 차는데….

 

루더렉 : …말씀에 뼈가 있군요. 혹여 플레이어를 책망하시려는 거라면 그만두십시오.

플레이어는 냉혹한 처단자가 아닙니다. 성정이 뼛속부터 그렇지를 못하지요.

분명히 불가피한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었든지 아니면 다른 모략이 있었을 겁니다.

 

아하센 영주 : …그렇게 들렸다면 사과하겠네. 당연히 나도 자네만큼이나 플레이어를 믿고 있어.

그러나 우리가 처한 현실을 냉정히 돌아보게. 지원군인 카르마뉴군이 갑자기 난입한 어느 병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하고 난 후 여태껏 우린 아무런 지원군 없이 맨몸으로 적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네.

게다가 바락스가 이끄는 보급대 또한 카르마뉴군의 전멸 이후론 소식이 닿지 않고 있어.

아직은 버틸 수 있다고 해도 전선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란 말일세.

 

루더렉 : 잘 알고 있습니다. 영주님. 우린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지요. 그러나 이러한 상황조차도 이미 우리가

각오했던 일입니다. 애초부터 냉정한 마음으로 시작한 전쟁이 아니지 않습니까.

플레이어가 상식에 벗어난 일들을 처리하는 동안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갈 겁니다.

그러니 바라건대 흔들리지 마십시오. 마음으로 지레 패배하지 마십시오.

결코 적들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해선 안 됩니다.

 

시에테 : …….

차가운 눈으로 뜨거운 말씀을 하시네. 총사령관 나으리.

 

아하센 영주 : !

 

루더렉 : …….

시에테라고 했나. 네 과거를 온 동맹군에 떠벌리려는 게 아니라면 제대로 기척을 내고 다니는 걸 권장하지.

 

시에테 : …좋아, 다음부턴 유의할게.

그나저나 지시할 게 있다더니?

 

루더렉 : 네가 암살자라면 응당 첩보 임무에도 능통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지금 당장 보급로로 가 보급대의 현 동향을 파악해 주길 바란다.

정말로 보급대가 카르마뉴군과 전멸했는지 아니면 다른 상황에 부닥쳤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하겠다.

 

시에테 : 알겠어. 맡겨줘.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시에테의 퇴장에 이어 상기된 표정의 클레르가 사령부 막사 내로 들어왔다.)

 

클레르 : 총사령관님, 영주님. 잠시 괜찮으시겠습니까?

 

루더렉 : 말씀하시게, 클레르 사도.

 

클레르 : …기뻐하십시오! 방금 내성으로부터 승전보가 도착했습니다.

플레이어가 직접 나서 국왕을 포섭했다더군요. 플레이어가 해낸 겁니다!

 

루더렉 : …!!!

 

아하센 영주 : 그것이 정말인가?!

 

클레르 : 예, 영주님. 틀림없습니다.

 

루더렉 : …….

플레이어….

 

(잠시 고뇌하던 루더렉은 이내 입을 열었다.)

 

루더렉 : 여러분, 들으십시오.

플레이어가 쟁취한 내성에서의 승리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난국에서 활로를 모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하센 영주 : 활로라면…!

 

루더렉 : 우리는 현재 굳게 닫힌 왕성의 문을 두고 좌우로 방어 진영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국왕을 포섭했기 때문에 이제는 왕성 안으로의 진입이 용이해졌습니다.

그러니 진지를 왕성 내로 옮겨 배수의 진을 칩시다.

왕성으로부터 출격한 왕국군과 노스폴군이 역으로 밖에서 왕성을 습격하게 만드는 겁니다.

 

아하센 영주 : 음, 방어 진지를 내부로 옮겨 시간을 번다는 전략이로군.

좋은 생각일세. 왕성 일대는 요새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니 방어 진지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없겠지.

거기다 왕성 내의 풍족한 물자로 부족한 보급품을 대체할 수도 있고.

 

클레르 : 더 안정적인 상황에서 플레이어에게 향하는 추격을 막을 수도 있겠지요.

지금 우리에겐 플레이어의 활약이 무엇보다 절실하니까요.

 

루더렉 : …의견이 합치된 듯하군요. 그럼 즉시 전 병력의 지휘관과 참모들을 소집해 계획을 검토합시다.

부탁해도 되겠나, 클레르 사도.

 

클레르 : 알겠습니다. 총사령관님.

 

(엷은 미소를 띤 클레르가 힘차게 막사를 나섰다.)

 

…….

….

 

세르하 : …아….

 

키안 : …괜찮으십니까?

 

세르하 : …죄송해요, 키안 님. 갑자기…, 어지럼증이….

 

키안 : 세르하 님…!!!

 

(세르하가 크게 휘청이며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 하자, 곁에 있던 키안이 그녀를 재빨리 안아 들었다.)

 

세르하 : …….

 

키안 : …세르하 님…!!! 정신 좀 차려 보십시오!!!

 

메르 : 무슨 일이야, 키안?!

 

키안 : 모, 모르겠습니다…. 가벼운 담소를 나누던 중에 갑자기 정신을 잃으셨어요.

바로 직전까지도 이상 징후는 없었는데….

 

메르 : 우선은 침상에 눕히도록 하자.

 

(키안은 양손에 세르하를 안아 들고 천천히 침상에 눕혔다.)

(그리고 손을 들어 세르하의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을 조심스럽게 닦았다.)

 

키안 : 세르하 님….

 

메르 : …열이 펄펄 끓고 있어. 이 정도면 일반적인 이유로 열이 나는 건 아닐 수도 있겠군.

…아직도 이면 세계의 통로를 열었던 여파가 남은 걸까.

키안, 열을 식힐 수 있도록 네가 곁에서 차가운 수건을 얹어줘. 나는 잠시 약재를 가져오도록 할게.

 

키안 : …알겠습니다.

 

….

 

키안 : …….

이젠 곁에서 최선을 다해 세르하 님을 지키겠다. 그렇게 다짐했건만….

막상 함께 있어도 당신을 지킬 수 없는 건 마찬가지군요.

…이럴 땐 플레이어처럼 특별한 힘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어찌할 수 없는 여러 상황 속에서도 당신을 거뜬히 지켜낼 수 있을 텐데요….

…….

기운을 내세요. 세르하 님. 부탁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입니다….

 

세르하 : …….

 

메르 : …그게 정말이야?

알겠어. 서둘러 채비할게.

 

키안 : 무슨 일이 있습니까?

 

메르 : 응. 플레이어가 왕을 포섭하는 데 성공한 덕에 현 전선을 물리고 왕성 내에 새 진지를 구축한다는군.

 

키안 : 플레이어밀레드를…!

…세르하 님, 들으셨습니까? 플레이어가 해냈습니다. 그러니 세르하 님께서도 기운을 내십시오.

 

메르 : …….

너무 걱정 마. 키안. 세르하는 강인한 내면을 지녔지. 그러니 지금 이 시련도 반드시 이겨낼 거야.

 

키안 : …말씀 감사합니다.

그래요. 세르하 님은 꼭…. 반드시 이겨낼 겁니다….

…….

 

세르하 : …….

…….

 

…….

…….

 

(한편, 동맹군 선봉.)

 

밀레드 : …….

기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플레이어, 그리고 여러분.

 

리엘 : 히히, 신수가 훤해진 걸 보니 눈물 콧물 싹싹 닦고 왔나 보네. 우리 스피노스는 여전히 기운이 없는데 말이야.

 

스피노스 : …….

…….

 

밀레드 : …….

내성의 모든 군사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어. 이걸로 당분간 동맹군은 한시름 놓을 수 있겠지.

물론 허수아비 왕이 내린 왕명이니만큼 그 시간이 길지는 않겠지만….

 

브린 : 예, 그러니 더욱 서두릅시다. 우리가 마하를 빨리 칠수록 동맹군도 더 안전해질 겁니다.

대성당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고 했었지요. 밀레드.

 

밀레드 : 그래. 맞아. 모두 날 따라와. 왕성에서 대성당으로 이어지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은….

 

근위병 : …….

 

(그때 알현실 문간에 선 근위병들이 일시에 창을 내려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브린 : …!!!

 

밀레드 : …이게 무슨 짓이지?

 

근위병 : 다음 지시가 내릴 때까지 알현실의 폭도들을 잡아두고 폐하의 안전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밀레드 : 아무리 중요한 명이라 한들 왕명을 넘어설 순 없는 법. 이들은 더는 나의 적이 아니다. 당장 물러서라.

 

근위병 :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그러나 이건 에녹 님의 명입니다.

 

밀레드 : ……!

 

브린 : ……! …에녹….

…하긴. 이렇게 우릴 쉽게 보내줄 리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배후에서 수작질하는 데엔 일가견이 있는 작자이니 지금까지의 상황을 소상히 지켜봤겠죠.

…일단은 한발 물러나지요.

 

….

 

브린 : …또다시 에녹이 움직이기 시작했군요.

우리들은 지금 적진 한가운데 놓인 셈이니….

저 근위병들을 다 쓰러트린다고 해도 지시를 받은 또 다른 병력이 우릴 막으려 들 겁니다.

최대한 적의 이목을 덜 끌고 탈출할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요.

 

밀레드 : …사실은 길이 하나 더 있어.

알현실의 근위병만 제압하고 나면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

물론 아직도 안전할지는 장담할 수 없어. 아주 옛날에…, 딱 한 번 지나가봤거든. 그래도 괜찮겠어?

 

[가보자.]

 

브린 : 예. 가봅시다. 플레이어의 말대로 지금으로선 그 통로가 유일한 대안 같군요.

스승님, 스피노스. 어쩌시겠습니까?

 

리엘 : 잉? 늙은이들 의견을 뭐 하러 묻고 그래. 너희가 좋을 대로 해!

 

스피노스 : …….

…….

 

브린 : 좋습니다.

그럼 가십시다. 밀레드. 근위병 제압은 저와 플레이어가 맡을 테니 안내를 부탁합니다.

 

밀레드 : 알았어.

플레이어, 가자.

 

(흐르는 용암을 지나쳐 밀레드의 인도를 따라 왕성 지하로 향해 긴 시간 방치되어 있던 듯한 어느 통로로 진입했다.)

 

밀레드 : …여긴 아직도 이전 그대로군.

 

브린 : 음…. 사람이 다녔던 흔적이 전혀 없는걸 보아하니 적어도 이 안에서 추격당할 일은 없을 듯합니다.

 

리엘 : …아이고, 내 이마!

컴컴한 데다 뭐 이런 장식을 달아놨어?!

 

밀레드 : 리엘 님, 괜찮으세요? 제가 횃불을 들어드릴 테니 두 손 편하게 따라오세요.

스피노스 님도요.

 

스피노스 : …….

 

(스피노스가 밀레드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밀레드 : …아….

 

스피노스 : 역겨운 호의는 집어치워라. 애송아.

 

리엘 : 아이, 정말.

소년 왕아. 나랑 스피노스는 알아서 잘 갈 테니까 걱정 마. 걱정할 일은 우리 말고도 태산이잖아, 그치?

 

밀레드 : …….

…네. 알았어요.

 

(리엘과 스피노스는 한 발짝 뒤처져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브린 : 하여간 저 둘은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 갑시다. 제 앞가림이라면 우리보다도 더 잘하는 노친네들이니까요.

 

밀레드 : …그래.

 

브린 : …그나저나 왕성 지하에 이런 통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음습하고 복잡한 게 보기엔 무슨 미궁 같습니다만.

 

밀레드 : 여긴 왕족만이 드나들 수 있는 비밀통로야. 오로지 왕과 그 핏줄만을 위해 마련해둔 일종의 도주로지.

 

브린 : 귀하신 분들의 고고한 쥐구멍이라 이거군요.

왕성이 습격당해도 언제든 수하와 백성들을 버리고 내뺄 수 있는….

 

밀레드 : …그런 셈이지. 하지만 동시에 내 목숨을 살린 쥐구멍이기도 해. 에이레 누나가 날 안고 여길 지났었거든.

그래서 어렴풋하게나마 이곳을 기억하고 있던 거야.

 

브린 : …….

뭐…. 쥐구멍이 제 기능을 하긴 했군요. 여길 나가면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기억합니까?

 

밀레드 : 음. 기억하냐고 물으면 흐릿할 뿐이지만 왕위에 오르고 나서 이 부근의 지리는 파악해뒀어.

비밀통로는 왕성 뒤편의 성벽 밖으로 이어져 있을 거야. 그 일대는 험지인데다가 절벽도 있어서 매복이나 추격이

까다롭지.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인적 없는 숲이 하나 나오는데 통과하면 타라타 도심에 잠입할 수 있어.

 

[잠입?]

 

밀레드 : 응. 플레이어.

대외적으로는 완벽히 부정하고 있지만 알다시피 법황의 실직적인 권위는 왕을 능가해.

애초에 타라타라는 도시 자체가 종교 시설과 관련 기관을 중심으로 발달해 있어.

이곳 왕성이 타라타 중심부에서 멀찍이 위치한 것도 그 때문이야.

그리고 지금 너희가 향하려는 타라타 대성당은 곧 법황청의 본청. 당연하게도 대성당은 도시의 심장부에 위치해 있지.

그 일대는 왕성 이상으로 경계가 삼엄할 거야.

 

브린 :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접근해야만 불필요한 충돌을 피할 수 있다는 얘기군요. 유념해두도록 하죠.

 

밀레드 : …응.

 

[몸은 괜찮나.]

 

밀레드 : …아, 응. 괜찮아.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가뿐한 느낌이 들 정도인걸. 신경 써줘서 고마워, 플레이어.

 

브린 : 정말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겁니까? 남아있는 신의 성력이나 마법적 징후도 없고요?

 

밀레드 : 그래. 더는 마법을 사용하거나 괴력을 낼 수가 없어. 정신을 지배당하는 느낌에서도 완전히 벗어났고.

이세트의 말처럼 내게 있던 부정한 힘은 정말로 사라진 것 같아.

 

브린 : 그러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거군요.

걸어 다니는 에르그 덩어리 같은 기운은 여전하니 마냥 평범한 인간으로 치부할 순 없겠습니다만….

…….

…음.

 

[무슨 생각?]

 

브린 : 갑자기 케아라 양이 떠올라서 말입니다. 일전에 마하는 케아라 양을 지배한 전적이 있지요.

지배가 끝났을 때 케아라 양의 상태가 어땠었는지 플레이어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그녀는 말 그대로 생사를 오갔습니다. 지금처럼 다시 회복하기까진 한참이 걸렸죠.

 

밀레드 : …….

 

브린 : …당신은 여러모로 기묘합니다, 밀레드.

플레이어를 통해 대강 들었습니다만, 이전에도 당신은 죽음의 신에게 노려졌다지요.

조건이야 케아라 양과 상이했겠으나 두 번이나 육체를 내주고서도 이렇게 멀쩡하다니….

솔직히 놀라움을 넘어 기가 찰 정돕니다. 거기다 죽음의 신 이후로는 마하까지 나서서 당신을 거두지 않았습니까.

이쯤 되고 나면 지극히 당연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 당신이 무엇이기에 신들은 당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는 걸까요?

 

밀레드 : …글쎄. 그 이유라면 나도 알고 싶은걸.

그 이유를 안다면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일들이 무엇 때문에 일어난 건지….

왜 에이레 누나, 이세트가 그렇게 죽어야만 했는지도 알 수 있을 텐데….

 

브린 : …….

그리고 알현실에서부터 계속 들던 또 하나의 의문입니다만. 왜 마하는 굳이 밀레드 당신을 내보낸 걸까요?

플레이어는 영웅입니다. 여러 신과 맞설 정도로 강하죠.

당신을 반신으로 만든다고 해서 반드시 영웅의 검을 빼앗을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는 겁니다.

특히나 마하는 직접 플레이어와 겨뤄본 적도 있으니 그 사실을 절대 모를 리 없었을 거고요.

 

밀레드 : …그건 아마 내가 플레이어의 친구이기 때문일 거야.

플레이어가 나를 쉽사리 공격할 수 없을 거란 점을 이용하려던 거겠지. 마하는 언제나 그런 식이니까.

 

브린 : …예, 마하라면 그러고도 남겠죠. 그런데 그 이유만이라기엔 어딘가 부족합니다.

단순히 옛 친구를 내세워 감정에 호소하려는 거였다면 다른 선택지도 많았을 테니까요.

이를테면 아까 말했던 케아라 양 사례처럼 말이죠.

당시 플레이어는 케아라 양을 보호하기 위해 저항 없이 공격을 받아내고 부상까지 입었습니다.

만일 마하가 영웅의 검만을 노렸던 거라면 그런 식의 전략이 더 먹혀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굳이 당신을 반신으로 만드는 공까지 들여가며 플레이어와 마주시켜야만 했다면….

분명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밀레드. 혹시 당신은 다른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까? 당신은 줄곧 마하 옆에 있지 않았습니까.

 

밀레드 : …글쎄. 마하와 꽤 오랫동안 함께 행동했지만 나도 그녀가 정확히 뭘 원하는지는 알지 못해.

그녀는 항상 필요한 만큼만 말하고 원하는 것 이상을 취해갔거든. 특히 날개를 되찾은 이후론 더더욱 그랬지.

나름대로 캐내려고 시도한 적도 있지만 번번이 헛수고였어.

…다만.

 

브린 : 다만?

 

밀레드 : 내가 어느 지하 실험실에서 크로우 크루아흐의 성력을 주입받던 날.

의식을 잃기 직전 마하와 에녹 사이에 오가던 대화를 약간 엿들었던 게 떠올라.

그날 내게 마취가 잘 안 통했던 것 같거든.

 

브린 : …지하 실험실이라면 이전에 들러본 적 있는 장소 같군요. 당신이 뭘 들었는지 우리에게 말해주십시오, 밀레드.

 

밀레드 : …….
…으으….

마하 : 어때, 에녹?

에녹 : …….
…….

마하 : 후후후, 그 정도야?

에녹 : …예. 차마 입을 떼기가 어려울 정도로…. 모든 게…. 비슷한 듯하면서도 전혀 다르군요….
이건…, 여신님이 보여주셨던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마하 : …너무 좋아하니까 막 질투가 나려고 하네.
뭐, 어렵게 구한 표본이니까 꼼꼼하게 잘 봐둬. 이런 건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거든.

에녹 : …….
…예. 여신님.
…….
여신님의 축복으로 또 한 번 실험에 큰 진전이 있겠군요….

 

브린 : 표본…. 실험…. 확실히 당신을 반신으로 만드는 것 이상의 의도가 있는 듯 들립니다….

물론 인간과 마족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하는 족속이니 당신의 특이한 육체에 눈독 들일 법도 합니다만….

 

리엘 : 자꾸 바보같이 이럴 거야?! 응?!

 

브린 : …!

 

밀레드 : …!

 

(저만치서 들려온 고함에 정신을 차린 밀레드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밀레드 : …아. 어디선가 바람이….

플레이어, 브린. 보여? 손에 든 횃불이 한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어. 출구 근처에 도달한 것 같아.

 

브린 : 스승님, 스피노스. 들으셨습니까? 싸우느라 못 들으셨을 것 같은데 벌써 출구입니다. 그쯤하고 서두르시죠.

 

리엘 : 아휴, 안 그래도 스피노스 때문에 힘든데 재촉은….

간다 가.

 

스피노스 : …….

 

….

 

(밀레드의 손끝을 따라가자 성 외곽을 둘러싸듯 펼쳐진 고지대와 무성한 들풀,)

(그리고 절벽 아래편으로 이어진 거친 길이 보였다.)

 

밀레드 :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아까 말했던 숲, 셴 마그 숲이 나와. 그리로 가면 곧장 타라타 도심과 이어질 거야.

 

브린 : 알겠습니다.

 

밀레드 : 그럼…. 나는 이만 왕성으로 돌아가겠어.

 

브린 : …왕성으로 돌아간다고요?

 

밀레드 : …그래. 타라타에서 벌어진 모든 참상은 전부 내 오판으로 인해 벌어졌어.

그러니 참상을 바로잡는 것도 나여야만 해. …어떤 위험을 무릅써야 하더라도 상관없어.

 

[혼자는 위험하다.]

 

브린 : 플레이어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 혼자 돌아가 봐야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끽해야 에녹의 손에 붙잡히기나 할 테죠.

그렇게 되면 이세트가 어렵게 마련한 기회마저도 전부 물거품이 되는 겁니다.

 

밀레드 : …….

 

[함께 가자.]

 

밀레드 : …내가…? 너희와 함께…?

 

브린 : 괜찮은 제안이군요. 우리와 동행하는 게 혼자 왕성에 남는 것보다 훨씬 안전할 수도 있습니다.

플레이어가 마하와 에녹으로부터 직접 당신을 보호할 테니까요.

 

밀레드 : …….

 

브린 : 아까 당신이 전한 마하와 에녹의 대화로 미루어보면,

그들에게 있어 당신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중요한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당신에게 얽힌 여러 의문을 풀어낼 수만 있다면 우린 그들의 목적에도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겠지요.

그러니 무모한 결단은 그만두고 우리와 같이 가십시다. 밀레드. 우리에겐 당신이 필요합니다.

 

밀레드 : …….

…알았어. 너희에게 도움을 줄 지원군이 되고 싶었는데…. 결국 또 보호를 받고 마는구나, 나는.

 

브린 : …당신이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걸 어쩌겠습니까. 이쯤 되면 그냥 익숙해지십시오.

지금은 안전하게 있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 겁니다.

 

밀레드 : …….

…….

 

브린 : 자, 그럼 빨리 움직입시다. 아직 우린 갈 길이 멉니다.

 

…….

…….

 

(한편, 타라타 왕성.)

 

에녹 : …….

 

근위병 : 에녹 님. 지시하신 대로 알현실 출입을 막고 병력을 증원했으나 탈출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폭도들이 사라졌습니다.

 

에녹 : …….

한낱 근위병 따위가 그들을 막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도주로가 어디인지는 파악했나?

 

근위병 : …송구합니다.

 

에녹 : …한심한 놈들.

뭐, 상관없다. 지금 상황에서 폭도들이 어디로 향할지는 뻔하니.

당장 타라타 대성당에 파발을 보내 왕을 납치한 폭도들이 그리 향하고 있다 전해라.

무능한 히스나이츠 대신에 법황청에서 직접 폐하의 안전을 확보할 것이다. 너희는 내려가서 다음 지시나 기다리도록.

 

근위병 : …예, 알겠습니다.

 

(근위병들이 물러가자 에녹은 방 한쪽 벽면에 걸린 거울을 향해 다가갔다.)

 

에녹 : …….

여신님.

 

….

 

마하 : 에녹. 기다리고 있었어.

 

에녹 : 그간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안색이 흐트러지셨군요.

 

마하 : 별건 아니고 작은 소동이 하나 있긴 했지. 루 라바다가 홀로 날 찾아왔었거든.

 

에녹 : …루 라바다가 말입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마하 : 후후, 걱정할 필요 없어. 녀석이 창끝을 들이대고 무섭게 굴길래 잘 타일러서 멀리 보내버렸어.

응석받이답게 제 아버지 얘기 몇 마디에 금세 동요하더라고. 다시 나타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에녹 : …….

다행입니다.

 

마하 : 그나저나 어서 네 얘기 좀 해봐. 보아하니 상황이 원하던 대로 흘러가지 않은 것 같던데.

 

에녹 : …면목 없습니다, 여신님.

이세트가 난입해 밀레드를 저지하고 그의 몸에 주입해둔 성력을 전부 정화했습니다.

그 덕에 다시 이성을 되찾은 밀레드는 결국 플레이어의 수중에 떨어졌고요.

…그녀의 돌발 행동은 미처 예상치 못한 변수였습니다.

 

마하 : 그래…. 나도 방심했어.

이세트는 말이지…. 내가 제 아비를 이용해 왕국을 야금야금 먹어가는 동안 아무것도 못 했었거든.

오히려 반란군이니 뭐니 발악해대며 왕국을 어지럽히고 내게 도움이 되는 상황을 조성해 줬지.

제 아비의 광증이 어디서 온 줄도 모르고 엄한데 칼을 겨누는 꼴이 참 우스웠는데….

그런데…. 죽어 나자빠진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 와서 갑자기 내 발목을 잡네…?

 

에녹 : …….

 

마하 : …이번엔 뭐가 달랐던 거지?

…설마, 다시 태양의 계시라도 받은 거야? 하지만 어떻게? 그 시체와 태양의 연결은 진작에 끊겼을 텐데.

 

에녹 : 그녀는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밀레드를 위한 희생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했죠. 그 행동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습니다.

 

마하 : …….

…그놈의 운명…. 매번 이런 식으로 나를 방해하는군. 정말 짜증 난다니까….

 

(감정을 읽기 어려운 표정으로 마하는 손톱 끝을 만지작거렸다.)

 

마하 : …꼬맹이는 크로우 크루아흐의 성력에 거의 먹혔었어. 그리고 플레이어에겐 친구를 벨 만한 배포가 없지.

하물며 자기를 동경하던 어린애라면 더더욱. 우리 영웅의 마음은 병아리 솜털처럼 부드럽고 여리거든.

둘의 대치가 계속 이어졌다면 결국 상황은 꼬맹이에게 유리해졌을 거야.

어떻게 영웅이 제 손으로 밀레드를 베겠어? 친구를 위하자고 자기 몸까지 바친 애인데.

영웅이 어쩌지도 못하고 빌빌대는 동안 꼬맹이가 직접 영웅의 검을 수중에 넣는다….

그렇게 아름답게만 흘러가 줬더라면 다른 귀찮은 책략 없이도 모든 게 아주 쉽게 풀렸을 텐데.

…….

…하지만 어쩌나. 이미 일이 이렇게 흘러간걸.

내가 이 계획의 불확실성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지름길로 가려다 한 방 먹은 셈 치고 하던 일이나 계속해야겠네.

…운명을 쳐부수려면 아무리 뼈아픈 실패라도 빨리 훌훌 털어내야지.

 

에녹 : …….

…아직. 아직 바로잡을 방법은 있습니다. 여신님.

 

마하 : 바로잡을 방법?

 

에녹 : …예. 사람의 마음엔 항상 틈이 있으니까요.

 

마하 : …아.

…….

 

(마하의 얼굴 위로 무언가 깨달은 듯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마하 : 그건 내가 매번 하던 말인데. 그렇지?

어디, 계속 말해 봐.

 

(에녹은 거울에 비친 마하의 귓전에 대고 낮게 무어라 속삭였다.)

 

마하 : …음. 음. 그렇단 말이지.

 

에녹 : 밀레드의 실패를 대비해 모든 준비를 이미 마쳤습니다.

남은 건 적절한 제물을 확보하고 계획을 실행하는 것뿐이지요.

지금이 여신님께서 예비하시던 때가 아님은 알지만 부디 명을 내려주십시오.

 

마하 : 명을 내리는 거야 쉽지. 하지만 에녹.

이대로라면 네가 영웅의 손에 죽을 거라는 거 확실히 알고는 있는 거지?

 

에녹 : 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이른 부재는 여신님의 계획에 있어 아무런 영향도 없을 겁니다. 맹세합니다.

 

마하 : 아이참.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에녹.

…어쩜 죽으러 가겠다는 말조차 이렇게 남 얘기처럼 하는지. 너도 참 한결같다니까.

…하긴. 그런 점 때문에 내가 널 좋아하는 거기도 해.

매사 무덤덤한 네가 오직 내게만 복종하는 걸 보고 있자면 기분이 짜릿해지거든.

뭐, 그 사랑스러운 모습도 오늘이 마지막이겠지만….

 

에녹 : …….

 

마하 : …….

그럼….

…….

 

마하 :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 넌, 날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어? 에녹?

나에 대한 네 신앙이 사실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본 적 없냐는 말이야.

잘 알다시피 난 거짓말쟁이 여신이잖아. 남을 속이고 기만하고 조종하는 게 천성이지.

내가 다른 이들에게 그러했듯…. 만일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밤부터 내가 널 속인 거라면?

내가 널 입맛대로 이용하기 위해 첫 순간부터 암시 마법을 걸어 신앙을 불어넣은 거라면?

그렇게 내가 네 인생을 타락의 구렁텅이 속으로 몰아넣은 거라면?

 

에녹 : …….

무채색인 제 몸속에도 붉은 피는 흐릅니다. 여신님. 제 믿음은 그 사실만큼이나 자명하죠.

당신을 향한 제 믿음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그런 건 이미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신님의 축복을 통해 한 사람의 일생으로는 일궈낼 수 없을 것들을 일궈냈습니다.

그 과분한 성취만으로도 당신을 숭배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길을 보여주셨고 그 후론 제가 오롯이 당신의 것이었다는 사실. 오직 그것만이 진실입니다.

 

마하 : …….

역시나 한결같은 답….

그래. 그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오롯이 나를 위해 죽길 바라.

…….

 

(거울 속의 마하가 붉은 날개를 펼쳐 마찬가지로 거울에 비친 에녹의 형상을 감쌌다.)

 

마하 : …후후.

 

마하 : 잘 가. 에녹. 네가 그리울 거야.

 

에녹 : …….

 

(마하의 마지막 한 마디를 곱씹듯 에녹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에녹 : 그거면 충분합니다. 나의 여신이시여….

 

….

 

에녹 : …….

…….

…….

…….

이제 죽으러 가야 할 때군.

모든 게 그녀가 뜻하신 대로 이루어지리라….

 

(에녹은 조용히 문을 나섰다.)

 

 

(스토리 다음을 향하여 완료)

(타라타 도심 스토리로 이어짐)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